고구려 고분인 각저총의 주실 동쪽 벽에는 씨름을 하는 두 역사(力士)와 심판을 보는 노인의 모습이 새겨있다. 그중 한 사람은 길게 째진 눈이나 큼지막한 매부리코로 서역인 즉 중앙아시아인 모습 그대로이다. 5세기 초 중엽 현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조성된 이 고분벽화는 고구려와 중앙아시아의 아랍-무슬림과의 교류를 여실히 보여준다.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이 그려진 아프라시압 궁전벽화 모습<자료출처=KBS 역사스페셜>.
(사진) KAIST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복원한 모습  <자료출처=KBS 역사스페셜>.

 또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카트에서 발굴된 아프라시압 궁전변화에는 새 깃털이 꽃힌 머리장식인 조우관(鳥羽冠)을 쓴 고구려 사신이 왕을 알현하는 모습이 발견된다. 당시 고구려와 당나라는 국운을 건 전쟁 중이었다. 이 사신들은 돌궐을 비롯한 북방유목국가들에게 당나라 공격을 요구하였을 것이 추정된다.

 실제 2차 고당 전쟁 중 돌궐이 당나라 본토를 공격해 고구려와 싸우던 당나라의 군대 6개 사단 중 2개 사단이 급히 본토로 돌아가고 고구려가 크게 승리했다.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당나라를 견제하여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북방유목민족과 접촉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한 것이다.( KBS 역사스페셜 <연개소문은 왜 투르크에 사신을 보냈나 2009년 10월 31일>)

 고구려가 돌궐과 동맹한 근거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삼국사기> 권 20 고구려 본기 및 <수서隋書>권 84 열전 49 돌궐 편에는 “수 양제가 607년 돌궐 지역을 순행하다가 돌궐의 추장인 계민가한의 장막에서 고구려의 사신을 만났다.”고 기록되어있다.

 돌궐과의 긴밀한 외교관계를 나타내는 유물로는 오르혼 강변의 돌궐비(8세기)가 있다. 돌궐제국의 영웅 ‘퀼 테킨’을 기리는 비문 중 “6세기 돌궐왕 무한 카간의 장례식에 고구려의 조문 사절이 왔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멸망하고 돌궐도 당나라의 분열정책에 휘말려 흉노의 후예인 위구르에 멸망한다. 이때 남아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결국 유럽을 지배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게 되니 오늘날 ‘터키’이다.

 터키는 6.25 전쟁 때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번째로 많은 15,000명을 파병해 용맹하게 싸웠으며 3,500명이나 되는 전사자가 나왔다. 터키에서는 한국을 ‘칸 카르데쉬 코렐리(피를 나눈 형제 한국인)’으로 부르며 ‘형제의 나라’라고 한다. 

 우리나라와 중앙아시아 무슬림 제국과의 관계는 이뿐만 아니다. 당의 점령군이 고구려에 있던 방대한 사서고를 불태워 우리의 상고사 자료들을 없애 버렸다. 고구려를 이어 발해를 일으킨 대조영은 동생인 반안군왕 대야발에게 사라진 역사서 복원을 명했다. 이때 대야발은 흩어져 있던 사서를 모으고 비문을 확인하며 여러 차례 답사를 간 곳이 바로 돌궐국이다. 대야발은 13년 간 각고의 노력 끝에 <단기고사>를 완성했다.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정수일 소장은 저서 ‘이슬람 문명’에서 “한자문명권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를 알고 그 존재를 만방에 소개한 사람은 다름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무슬림들로 그 역사가 자그마치 1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지리학자 마끄디는 <창세와 역사서>(966)에서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고 하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유하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기술했다. 신라를 신비의 이상향으로 선망하여 많은 아랍-무슬림들이 신라를 오가고 정착까지 했다고 한다. 신라의 대표적 향가이자 설화의 주인공 처용도 어쩌면 바다를 건너온 아랍-무슬림일수도 있겠다.

 이후 고려에 정착한 무슬림에 대한 기록도 있다. 주로 대몽항쟁기 때 원나라의 조정에서 일하던 무슬림들이 사신 역관 서기 시종무관 등의 직분으로 고려에 파견되었다가 귀화했다. 덕수 장씨 문중을 이룬 장순룡은 1274년 고려 충렬왕의 몽골비(妃)인 제국공주의 종관으로 들어왔다가 정착했다. 경주 설씨의 시조인 회골도 위구르 출신이며 임천 이씨도 비슷한 과정으로 귀화했다.

 이렇듯 우리나라와 무슬림 나라들과는 수천 년의 인연을 맺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류리서치 센터의 연구프로젝트인 퓨(PEW)포럼은 올해 1월 “2010년 현재 전 세계 무슬림이 16억 1,931만 명이며 이는 세계인구의 23%라고 발표했다. <한겨레>가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안정국 교수에게 의뢰한 자료를 보면, 한국에도 13만~14만 명의 무슬림이 살고 그 가운데 4만 5천여 명은 한국인이다.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우즈베키탄 등 이슬람 국가에서 결혼, 취업, 유학 등으로 한국에 살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슬림'하면 ‘일부다처’, ‘테러국가’, ‘명예살인’ 등을 떠올리며 낯설고 위험하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이는 1945년 미국에 의해 해방을 맞은 우리나라가 미국적 시각을 통해 이슬람을 바라보고 이슬람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적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멀게만 느꼈던 무슬림이지만, 상고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와 무슬림 국가들은 깊은 관계를 맺고 같은 문화를 공유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계속된 역사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결코 한반도 안에 갇혀있던 폐쇄적인 나라가 아니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의 역사에 드러나듯 세계 각국과 초원길, 비단길, 바닷길을 통해 활발한 교류를 하며 수많은 문화를 수용해 더욱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다문화 사회였다. ‘단군의 후예’라는 정체성은 혈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법맥으로 연결된 것으로, 우리 역사는 튼튼한 뿌리 위에 풍성한 가지를 펼쳐온 것이다. 다만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에 갇혀 뿌리를 잊고 가지를 근본이라 여기게 되었다. 이제 사대사관 식민사관을 걷어내 본래 우리 민족의 진취적이고 넓게 인간을 사랑하던 역사와 문화를 되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