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은 한국문화와 사상의 고향이다. 신라가 망하고 그 유민들이 안동으로 이주하여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고하며 그 결과 안동이 문화의 고장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안동은 신라유민이 살았던 고장이라는 것인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들의 조상은 본시 조선유민이요 천손이었다고 한다. 그런 고장에 『단군세기』 『태백일사』가 비장되어 왔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우리나라 역사는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 내려왔다. 하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계통의 역사요, 다른 하나는 이명·이암·이맥의 『환단고기』계열의 역사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떠나, 지금까지 우리는 한 쪽으로 기울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위주의 역사였고 『환단고기』『규원사화』가 엮어낸 역사는 극히 최근에 와서야 알려져 세상 사람들이 놀라고 있다. 말로는 우리 민족사는 반만년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2000년사를 배워 온 것이다.

 상고사가 없다 보니 우리 역사는 머리 없는 역사가 되었고, 대륙의 강역을 잃다 보니 사지가 잘린 역사가 되어 버렸다. 『환단고기』가 발견됨으로서 우리 역사의 머리와 사지가 회복되었다. 『환단고기』가 고성 이씨 문중에서 보존되어 왔다는 사실은 따라서 끊어진 민족사를 이어준 것이며 콩알만 하게 줄어든 우리 역사를 훨씬 더 큰 역사로 만들어 준 것이다.

 『환단고기』의 유래를 알고 보니『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집필된 고려시대 말에 나왔다.『환단고기』에는 『삼국유사』에 단지 「고기」라고만 기록한 문헌들이 어떤 책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으니『삼성기』 『단군세기』그리고 『태백일사』「천부경」과 「삼일신고」 「소도경전본훈」등이 그것이다. 모두가 진귀한 기록이다. 이들 기록을 소장하거나 기록한 이가 고성 이씨 문중의 이명, 이암 그리고 이맥이었다.

 이중에서 신원이 확실한 이는 이암과 이맥이다. 호를 행촌이라 한 이암은 고려 말에 문하시중을 지낸 정치인이요 당대 제일가는 명필이었다. 강원도 오지의 청평사와 강화도의 홍행촌에도 은신했던 선비이다. 이암은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고려 말 개혁정치를 주도하고 여진족의 침략을 물리친 애국자였다. 일십당 이맥은 이암의 현손으로 조선시대 선비다. 폭군 연산군에게 미움을 받아 강원도 오지의 청평사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다시 복직하여 내각에 비장된 비서들을 읽고 『태백일사』를 남긴 분이다.

 『진역유기』를 남긴 이명 한 분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데 후일 『규원사화』를 쓴 북애라는 선비가 이명의 책을 읽었다고 하니 아주 조작된 인물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세조의 수서령, “민간인이 소장한 모든 상고사 기록 압수, 어명 어기면 사형”

 그런데 이맥이 내각에서 읽었다는 책들은 앞서 세조(1455-1468)가 수서령收書令을 내려 몰수했던 비서秘書들이였다. 세조 2년에 왕은 각도 관찰사에게 민간인이 소장하고 있는 모든 상고사 기록을 압수하라고 명했다.

 “어명을 어기고 책을 감춘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했으니 요즘으로 말하면 불온서적이었다. 이들 사서들이 모두 역성혁명으로 집권한 조선왕조를 반대하는 실지원국失志怨國의 무리들의 참서讖書로도 볼 수 있으나 모두가 그랬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때 압수된 고기의 서목들이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되어 있는데 그 중의 일부가 이맥이 『태백일사』에 수록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맥은 목숨을 걸고 『태백일사』를 저술하고 이것을 감추라고 명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암과 이맥만 훌륭한 것이 아니라 이들 고기를 극비리에 숨겨서 보관한 후손들이 그에 못지않게 훌륭하였다고 할 수 있다.

 『태백일사』란 ‘잃어버린 태백산의 역사’ 즉 ‘환국과 신시의 역사’란 뜻이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태백산의 비밀스런 역사를 인정하지 않았고 단군 이후의 역사만 인정하였다. 아니 이 역사만은 대외비로 정하여 서운관書雲觀에 비장했던 것이다.

 조선, 명나라와의 사대외교위해 단군 이전의 역사 부정해야

 당시의 조선왕조는 명나라와의 사대외교관계를 고려하여 단군 이전의 역사를 부정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왕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된 마당에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는 금지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의 후손이란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상고사는 금지된 역사요, 국시國是에 위반되는 보안법에 위반되는 사항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조(1455-1468)가 『태백일사』의 소장자를 죽이겠다고 까지 위협했을까. 세조는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불의의 임금으로서 약점이 많은 임금이었다. 그래서 혹시 명나라에 고자질을 할까봐 매일 밤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에 사대하는 것을 매우 중시하였다.

 게다가 『태백일사』를 비롯한 여러 고기를 모조리 없앤 것은 우리 역사에 큰 손실을 입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사라진 여러 기록들을 소중하게 간직하여 후세에 전한 이맥과 그 후손들 모두가 큰일을 한 것이다. 조선왕조가 흔들리고 나라가 망하게 되자, 또 한 분의 고성 이씨 해학 이기가 제자 계연수를 시켜 『환단고기』를 출판하였다. 이기 선생은 한말의 애국지사로서 나라가 망국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순국하였다.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소 명예교수,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명예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