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의 초대 교장 이동녕 선생. (자료제공=독립기념관)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연마코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에 우리 우리 청년들이라. 두 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떳~다.”

 

오는 6월 10일로 설립 100주년을 맞는 신흥무관학교 교가의 일부이다. 이 속에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취지와 역사의식을 분명하게 밝혔다.

올해 초부터 독립운동 관련단체, 민족단체, 국학운동 단체 등을 중심으로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학술회의와 관련행사가 열리고 있다. 사단법인 국학원 산하 광복의병연구소가 지난 1월 12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새로운 한·

일 관계 모색’을 주제로 한 학술회의에 이어 4월 17일엔 안동국학원도 안동독립운동과 연계하여 학술회의를 열었다.

또한 올해 1월 27일 발족한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국가보훈처의 후원을 받아 지난 5월 13일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신흥무관학교와 항일무장독립운동’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를 통해 신흥무관학교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국외 독립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치의 필요성은 이미 1909년 독립운동가 양기탁의 서울 집에 모인 신민회 간부인 이동녕 주진수 안태국 이승훈 김구 등에 의해 논의되었다. 항일무장투쟁의 본산인 신흥무관학교는 국권을 잃은 경술국치의 이듬해인 1911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에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주역은 우당 이회영 6형제를 중심으로 한 상동파와 석주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등 안동지역 혁신 유림계, 그리고 이건승 정원하 홍승헌 등 강화학파 계열이다. 1910년 12월~1911년 1월 약간의 시차를 두고 망명한 3개 그룹의 독립운동 지사들과 일행이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었다. 이는 1910년대 항일운동의 특징으로 전 재산을 처분하고 대대적인 망명을 통해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인적, 물적 토대를 갖추었던 것이다.

신흥무관학교100주년기념사업회가 지난 5월 13일 개최한 기념 학술대회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했다.

 

그러나 비용관계로 군사훈련을 하면서 장총이나 권총, 대포, 탄약 등 병기가 없어 이론교육밖에 할 수 없었고 말을 구하기 어려워 기마훈련도 어려웠다. 대신 정신교육과 신체 단련에 집중하고 각종 훈련을 강화했다. 학생들은 수업료 등 일체의 학비를 내지 않았고 숙식도 교내에서 공동으로 했다. 이회영 일가 등 유지들이 염출한 기금으로 운영하고 동포 여성들이 모두 나와 학생들의 식사준비를 맡았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1898~1909) 출신 장교들이 경술국치 이후 곧바로 만주에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독립군 양성기관의 교관으로 활약함으로써 항일무장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우리 힘과 노력으로 국권을 되찾겠다는 강인한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으로 1920년 폐교될 때까지 3천5백여 명에 이르는 독립군 간부를 배출했다. 일제의 박해와 잇따른 사고로 폐교한 후 지청천은 사관생도 300명을 인솔하고 백두산 안도현 삼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의 부대와 연합하였고, 김좌진 부대의 뒤를 따라 밀산에 도착해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서로군정서 의용대,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등에 참여해 무장독립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독립운동사에 혁혁한 성과로 남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서로군정서의 간부들도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군사(軍史)연구자인 한용원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는 “국군의 창군사를 보는 시각은 광복군 모체론, 경비대모체론, 미제 용병론 등 3가지로 나뉜다. 이중 미군정 때 경비대 창설에 주역을 담당했던 군사영어학교 출신 등이 군의 수뇌부를 형성했기 때문에 경비대를 국군의 기원으로 보는 경비대 모체론이 많이 퍼져 있다.”이라고 했다.

한 교수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주도했던 독립군이 광복군 창설 뒤 광복군에 편입되어 임정 산하의 통합된 국군이 되었으므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국군 역시 이런 군맥을 이어야 한다.”며 “독립군-광복군-국군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적 정통성이 확립되지 못하고 군의 역사가 왜곡되었다.”고 비판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 국군 창군사의 정통성을 바로 잡는 과제는 전 재산과 목숨을 내놓은 애국선열의 독립정신을 계승한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국학신문 6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