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어머니께 버럭 짜증을 내고 나왔더니 오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참다못해 전화를 걸어 차마 미안하단 말은 못하고 다른 얘길 꺼내어 헤헤거리고 나니 가슴 답답증이 풀리면서 휴~ 살 것 같습니다. 내 참, 전 언제나 철이 들런지요.

 ‘철들다’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기다’
 영화 <내 이름은 칸>의  주인공은 그 힘을 아주 어려서부터 얻은 것 같습니다. 인도꼬마 칸이 동네 이슬람교도들이 힌두교도들을 욕하는 것을 듣고 따라 하자, 칸의 어머니는 아들의 편견을 경계하며 단호하게 일러둡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착한 행동을 하는 착한 사람과 나쁜 행동을 하는 나쁜 사람. 하는 행동이 다를 뿐. 다른 차이점은 없단다.” ‘나쁜 행동을 하는 자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은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전 세계 누구나 알 만한 내용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바른 판단을 지키지 못하고 ‘나쁜 행동’의 자리에 슬그머니 다른 것을 들여놓는 어리석음이 다반사죠.   

 천재성과 자폐증을 동시에 지닌 칸은 어머니를 잃고 동생이 있는 미국에 와서 싱글맘 만디라를 만나 아들 샘과 행복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헌데 9.11테러 이후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그의 이름 ‘칸’ 때문에 그와 그의 가족은 왕따를 당하고, 행복을 잃게 되지요. 슬픔에 잠긴 만디라가 칸을 원망하자 칸은 자신의 억울함 - ‘내 이름은 칸(이슬람교)이지만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대통령을 만나러 길을 떠납니다. 그 길에서 그는 오히려 테러리스트 혐의로 고문까지 받게 됩니다. 하지만 착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는 중심을 잃지않고 평화를 지키고 수재민들을 돕는 그의 행동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의 무고함을 알게 되고, 자신들의 편견과 두려움을 자각하게 됩니다.    

 실제로 9.11 이후 이슬람교도들은 이런 고통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몇 십 명의 테러리스트 때문에 12억이나 된다는 이슬람교도 전체를 미워하는 것이지요. 두렵고 불편하면 원인이 아닌 적을 먼저 찾고, 말에 속아 행동이 아닌 이름으로 파악하고, 나와 다르면 잘못되었다, 나쁘다고 말하는 우리는 아직 사리 분별과 판단을 제대로 못하니 ‘철들지 못한’ 철부지인 모양입니다. 

 이런 철부지들이 살아가는 지구를 바라보며 우리의 창조주는 무어라 생각하실까요? 무엇을 믿고 살든, 어떤 이름으로 살든, 누가 이기고 지든, 누가 옳고 그르든, 누가 더 잘나든지 간에 지구 전체를 돌봐야 하는 그분께 그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서 어서 철이 들어 친구에게 몽둥이가 아닌 도움의 손을 내밀기를 바라고 계실겁니다. 내 잘난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으니 고통받는 생명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라고 하시진 않을까요? 너 밖에 믿을 사람이 없으니 제발 지구가 평화의 에너지로 가득 차게 해달라고 상을 잔뜩 들고 기다리지는 않으실지… 내 행동으로 지구에 보태질 웃음, 기쁨의 눈물, 감사의 기도를 헤아리면서!

 새삼 누구도 알아주지 못할 작은 일과 감정에 휘둘리는 철없음을 부끄러워 하며 내 가치를 높일 만한 ‘착한 행동’이 무엇일지에 마음을 옮겨봅니다. 그리고 말과 다짐만 무성했던 비생산성을 바라봅니다. 아, 이제 공회전을 그만하고 어디론가 좀 출발해야겠습니다. 오해와 억울함과 두려움을 지나서 두 가지 종류의 인간 중 나쁜 쪽이 아닌, 좋은 쪽에 서기 위해 꿋꿋하게 걸어 나간 칸처럼 저도 씩씩하게 나아가야겠습니다.

 많이 웃고 많이 울며 본 감동영화 <내 이름은 칸>!
 만디라의 마지막 고백이 귓가에 남습니다. “칸은 내 원망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인품으로 이루어냈어. 내 분노가 우리를 갈라놓았는데도, 그의 사랑이 우릴 다시 함께 있게 했어. 이제 희망을 품고 기억할꺼야. 다신 그를 떠나 보내지 않고 함께 이 사랑을 지켜나갈께” 

[출처: 브레인비타민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