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사람이 있다. 독립운동에 관해서는 교육ㆍ종교ㆍ경제ㆍ언론 어느 한 분야 손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문어발 확장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교육이 필요하면 학교를, 정신이 필요하면 민족 종교를,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면 회사를 차렸다. 민족을 한뜻으로 모을 언론이 필요하면 신문을, 만주로 이주한 우리 민족이 머물 곳이 필요하면 대토지를 마련했다.

▲ 백산 안희제 선생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ㆍ1885~1943). 그는 이 모든 것을 현실로 만들었던 독보적인 독립운동가이다. 그런데 여기서 떠오르는 궁금증 하나, 안희제는 어떻게 이 모든 분야의 독립운동을 가능케 했는가?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운동 자금의 6할이 백산(안희제)의 손을 통해 나왔다.”고 했다. 그만큼 독립운동에서 안희제의 역할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그 많은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을까.

 제아무리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할 정신을 갖고 있다고 한들, 나라를 일시에 구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한들 사람이 움직이는 데는 돈이 든다. 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도 많은 돈이 드는데, 하물며 숨줄이 끊어질 듯한 나라와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했겠는가.

백산상회는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

 독립자금의 젖줄을 마련한 안희제의 이야기는 학교에서 시작된다. 첫 독립운동으로 인재양성을 결심하고 3개의 학교를 세우며 교육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후방에서 하는 교육사업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독립운동의 최전방에서 이 민족을 살리는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때 만난 것이 바로 국조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大倧敎)이다. 그는 훗날 대종교 3대 교주가 되는 윤세복(尹世復), 광복 후 정치인으로 활동한 서상일(徐相日) 등과 1909년 10월 대동청년단(大東靑年黨)을 조직하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한 자신의 역할에 눈을 뜬다.

 안희제는 1914년 부산에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설립한다. 이후 백산상회는 자본금 100만 원을 들여 1919년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 ‘백산무역주식회사’로 거듭난다. 당시의 100만 원은 오늘날 400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백산상회는 겉보기에는 해산물과 농산물을 사들여서 위탁 판매하는 회사였지만, 실제로는 만주 항일무장단체와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할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만든 회사였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경주 마지막 최 부자인 최준을 위시한 영남의 내로라하는 대지주 172명이 주주로 참여하기에 이른다.

 당시 백산상회의 취체역(取締役, 오늘날 대표이사) 사장으로 10년간 활동해온 최준(崔浚ㆍ1884~1970)의 손자 최염(78) 씨는 “백산상회 이름으로 대출을 받거나,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 부채가 생기는 척 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당시 일제의 눈을 피해 활동자금을 구할 유일한 길이었던 백산상회는 망할 것을 알고서 세운 회사였다.”고 전했다.

 당시 최준은 안희제에게 전달한 독립운동 자금의 반이라도 임시정부에 전달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워낙 은밀하게 전해야 했던 돈이었던 만큼 장부를 만들 수도, 확인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김구와 만난 최준은 안희제에게 자신이 전달한 돈이 김구가 받은 돈과 한 푼의 누락도 없이 일치하는 것에 놀라 안희제의 무덤을 향해 대성통곡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독립조국의 이상국가로 모두를 널리 이롭게하는 신시배달국을 꿈꾸었다

 서슬 퍼런 일제의 감시 아래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다는 것은 목숨이 열 개라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안희제가 상해 임시정부나 만주 항일독립투쟁에 얼마의 자금을 어떻게 전달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 1914년 부산 중구 동광동에 설립한 백산상회. (사진제공=독립기념관)

 다만, ‘임정 첩보 36호’였던 안희제의 활약을 비추어 가늠해볼 수 있다. 안희제는 백산상회에서 벌어들인 거의 모든 돈을 임시정부에 보내는 한편, 기업가나 부자들을 찾아다니며 모금했다. 이 돈을 보내기 위해 안희제는 일본인과 같은 복식을 하고 다니거나 얼굴 변장을 함으로써 일제의 눈을 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백산상회는 독립운동 자금 조달처는 물론 국내외 독립운동 기지로서도 큰 역할을 했다. 부산부 본정 삼정목(現 부산시 중구 동광동 3가 10-2번지)에 문을 연 백산상회는 이후 국내에는 서울ㆍ대구ㆍ원산 등 18개소, 중국에는 안동ㆍ봉천ㆍ길림 등 3개소의 지점을 만들어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냈다. 또한 백산상회의 지점들은 독립운동가들이 서로 활동을 교류하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연락사무소이자 독립신문의 배부처로써 활용되었다. 또한, 백산상회는 장학사업으로 ‘기미육영회’를 설립하여 장래 독립운동에 활약할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일본과 영국, 독일 등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국학연구소 김동환 연구원은 “안희제는 백산상회를 통해 우리 민족 경제의 근대적 효시를 보여주었다. 왜 돈을 버는지, 왜 사업을 해야 하는지.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국가를 위해서 기업가가 어떤 가치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1927년 백산상회의 정체를 알게 된 일제의 끈질긴 탄압으로 백산상회는 문을 닫는다. 이후 안희제는 중외일보 등 언론을 활용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33년 만주로 넘어가 국외 독립운동기지로 발해농장을 마련한다. 이를 통해 그는 널리 모두를 이롭게 하는 이상국가(理想國家)인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을 독립 조선에서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비록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안희제는 1943년 유명을 달리하였으나, 그가 실현하고자 했던 ‘신시배달국’의 꿈은 여전히 후세의 가슴에 남아 더 나은 대한민국을 향해 뛰고 있다.

< 국학신문 6월호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