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故) 유일한 박사의 흉상 (유일한 기념관)

 그는 철쭉이 만개(滿開)한 2011년 4월 22일 유한동산을 거닐고 있다. 서울시 구로구 유한공업고등학교에 있는 유한동산에는 유일한 박사 자신의 동상과 묘, 그리고 딸 유재라 여사의 묘가 안장되어 있다. 그는 봄 햇살 아래 오가는 학생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유한(柳韓)’이란 내 이름에서 나온 말이면서, 동시에 버드나무와 같이 웅대한 조국을 뜻한다네. 바로 저 아이들이 내가 꿈꿨던 그 웅대한 대한민국을 만들 씨앗이지.”

 40년 전 세상을 떠난 유일한 박사의 어록을 바탕으로 가상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제약부문 8년 연속 가장 존경 받는 기업 1위, 대학생이 뽑은 일 하고 싶은 기업 1위, 바로 유한양행이다. 기업의 규모가 아닌 창업자의 철학으로 우리나라 최고 기업으로 손꼽히는 유일한 박사의 '유한양행 이야기'는 192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을사늑약과 러일전쟁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이던 1904년, 유일한 박사는 9살의 어린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성공한 재미사업가로 돌아왔다. 라초이식품회사(La Choy Food Product Inc.)로 성공한 그가 조국에서 돌연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한 이유는 무엇일까.

 “병들지 않은 건강한 국민만이 조국을 되찾아 주권을 누릴 수가 있다네. 당시 우리 국민은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약이 없어 제때 치료를 못 받아 지치고 병들어 있었지. 조국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제약 사업이라고 결심하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전국에서 약 주문이 끊이지 않았소. 열차가 서지 않는 지방에서는 기관사에게 부탁해서 그 지역을 지날 때 약을 단단하게 포장해서 열차 밖으로 던져 달래서 약을 배달받을 정도였으니까.”

▲ 주식회사 유한양행 발족을 마치고 찍은 사진(맨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유일한 박사) (사진제공=유일한 기념관)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 하였던가. 9살에 떠나 20년이 넘는 세월을 이역만리 타향에서 보내는 동안 자라난 키만큼 그의 안에서 나라를 향한 애끊는 심정도 함께 자라났다.

 “요즘 말로 조기유학을 떠난 셈인데, 그때 아버지께서 어린 내게 ‘큰 나라에서 배우고 살아남아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을 하라.’고 하셨지. 나는 우리나라를 일제의 손아귀에서 구해내겠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냈어. 14살이 되면서 여름방학마다 네브래스카 주(州)에 개설한 한국 소년병 학교에 다니며 군사 훈련을 받았지. 1919년, 24살이 되면서는 필라델피아 한인 총 대표회의에 참가하며 서재필, 이승만 등과 교류했다네. 어린 시절부터 나의 모든 것은 조국을 강렬하게 향하고 있었지.” 

 정치자금이 아니라 정직한 납세가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국민 건강과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며 키워온 유한양행이었지만, 옳지 않은 길은 가지 않는 그의 곧은 성품 때문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독재정권에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자 탈세 누명을 얻어 여러 차례 세무 사찰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매번 모범 납세, 우량 납세 기업으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기업이 정부와 너무 친하면 정권이 바뀔 때 그 기업은 망해. 그래서 ‘정직’이 유한의 영원한 전통이 되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네. 기업이 정직하게 움직여야 나라가 움직이지. 정치 자금이 아니라 정직한 납세가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것일세. 그리고 정치는 정치가들이, 기업은 기업가들이 해야지. 기업가란 성실한 기업 활동으로 이윤을 남겨 그것을 사회를 위해 사용하면 되네.”

 최근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이 3세대 경영을 공식화하며 경영 최일선에 자녀를 배치했다. 혹자는 대를 이은 경영권 승계가 안정적인 기업 운영을 가져올 것이라 기대하고, 또 다른 이들은 북한의 3대 세습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일한 박사는 1969년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전무였던 조권순에게 완전히 넘기며 한국 최초로 전문경영인 시대를 열었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한 아들, 일선에게 경영권을 승계했었네. 하지만, 기업과 개인적인 관계는 설사 가족이라 하더라도 엄격히 구별되어야 해. 그것이 기업을 키우는 지름길이자 기업을 보존하는 길이라 생각해서 결정을 뒤엎었지. 기업은 왕국도 아니고 왕조도 아니라네. 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의 공동운명체인데, 그 운명의 최종결정자를 생물학적 기준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 아니겠는가.”

한국 최초로 전문경영인 시대를 열다

 그와 유한동산을 걸으며 나누는 이야기의 화제는 자연스레 교육 사업으로 옮겨갔다. 그는 학생들에게 투자하는 것이 나라의 장래를 위한 확실한 투자임을 강조했다.

 “어린 시절 나는 우리나라에는 변변하게 교육하는 곳이 없어 아쉬웠다네. 그래서 재단법인 유한학원을 세웠지. 64년 한국고등기술학교(현 유한공고)의 신입생을 받으면서 좋은 학교, 좋은 선생님, 그리고 좋은 나라가 있으니 내가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모를 걸세. 사람이 죽으면서 남기는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지. 나는 그것이 교육이라고 본 것일세.”

▲ 고(故)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 (유일한 기념관)

 파란만장했던 유일한 박사는 그의 나이 76세가 되던 1971년 3월 11일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유품은 구두 두 켤레와 양복 세 벌, 간단한 가재도구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남긴 정신은 대한민국의 대표 홍익기업으로 지금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내가 세상을 뜨고 한 달 뒤 공개된 나의 유언장을 두고 다들 놀라워하더군. 약간의 땅과 돈을 딸 재라와 손녀에게 주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지. 유한양행은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설립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이 사회로부터 얻은 재산은 다시 사회로 환원해야지. 참, 유언장에 400만 원을 빌려 간 조권순 사장이 덜 갚은 110만 원은 꼭 학교 재산에 넣도록 하라고 써두었는데, 아마 적잖이 놀랐을 게야. (웃음)”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유일한 박사에게 홍익경제의 주인공으로서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를 부탁했다.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지.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라네. 기업도 마찬가지라네. 기업이 국민의 행복을 생각하며 운영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홍익기업은 없을 게야.”

<국학신문 5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