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2011)부터 4천3백43년전 단군 왕검(檀君王儉, 단군임금)이 우리나라를 건국한 역사 기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 1284) 제1권에서 전한다. 고승 일연(一然, 1206~1289)이 고려 충렬왕 11년에 쓴 이 역사 기사에는 조선 상고시대의 단군 역사를 고대 중국 3세기 역사책 [위서](魏書)로부터 인용했다. 여기 제1권에서는 [위만조선][마한][예맥][낙랑][대방][발해][옥저][오가야][북부여][동부여][고구려][변한 백제][진한][신라 시조 혁거세왕][남해왕][탈해왕][연오랑 세오녀][진덕왕][김유신] 등등 여러 왕신(王臣)들을 고루 다루고 있으나 전혀 건국 연대순(편년체)의 기사는 아니다.

 

  진(晋)의 초기 진수(陳壽, 233~297)가 엮은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는 모두 30권이다. 그중에서 한국의 고대 역사를 다룬 것이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이다.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동이](東夷)라는 국가 지역은 상고시대의 조선 민족의 터전을 기리키며 “동이라는 글자를 풀이한다면 동쪽의 큰활을 가진 민족”(1)이라고 문자학자 진태하(陳泰夏) 교수는 밝혔다.

또한 진태하 교수는 고대 문헌들을 통해 심도있고 다양하게 문자들을 예시 고증하면서 고대에는 ‘이’(夷)라는 모양의 글자가 아니고 갑골문(甲骨文)의 상형(象形)으로서 활모양의 큰대(大) 자와 활궁(弓) 자를 위 아래로 합친 하나의 글자였음을 지적했다. “이로써 볼 때 ‘夷’는 ‘오랑캐 이’가 아니고 ‘큰활 이’라고 해야 마땅하며, ‘동이’(東夷)는 곧 동쪽의 활 잘 쏘는 민족임을 지칭한 것을 알 수 있다”(2)고도 했다.  여기 부기한다면 진수의 [위지] 30권중에는 고대 일본을 가리키는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등도 들어 있다는 것을 아울러 밝혀둔다.

그 밖에도 기원전 5세기~3세기경 중국의 사서(史書) [관자](管子)와 [산해경](山海經)> 등에도 관련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앞에 보았드시 고조선에 단군조선과 위만조선, 마한 등등을 기술하고 있으나 기자조선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관계 사항들은 심층 연구와 규명이 요망된다. 왜냐하면 중국과 일본 쪽의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관계 주장에는 빈번히 역사왜곡이 교묘하게 빚어져왔기 때문 이다. 더구나 근년부터의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은 고구려마져 흡사 자기네의 복속 국가로서 흡수하여 논급을 거듭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우리로서는 그와 같은 중국측의 역사 왜곡에 대한 보다 철저한 연구와 대응을 펼쳐나가야할 일이라고 본다.

 일연이 [삼국유사] 서문에 이어 맨 앞에 필두로 쓴 [고조선]은 다음처럼 엮어졌다. 즉 “위서(魏書)에 밝힌 것은 ‘2천년 전에 단군 왕검이라는 사람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고 개국하니 이름은 조선이었다’ 하며, 예전 기록에 알려지기를 ‘옛날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아버지는 그의 뜻을 알고 하늘 아래 세상(三危太白)을 굽어보더니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펼치라(弘益人間)고 말하며 천부인(天符印) 3개를 내주고 내려가서 사리에 통달하는 세상을 이룩하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 간 고장을 이른바 신시(神市)라고 한다. 그를 일컬어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했다. 그는 하늘에서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며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내려갔으며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병(主病) 주형(主刑) 주선악(主善惡) 등 인간사 360 여가지를 가려내며 이치에 알맞은 살기 좋은 세상(理化世界)을 펼쳤다. 이 때에 굴속에서 함께 살던 곰과 범이 신웅(神熊)에게 소망하기를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하였다. 이에 신웅이 영험한 쑥 한줌과 마늘 스무개를 주시며 너희가 이것을 먹으며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 모습으로 태어나리라 하셨다. 곰과 범은 그것을 먹으며 37일 동안 금기하며 곰은 여자 사람으로 바뀌었으나, 범은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매 항상 신단수 아래서 아기갖기를 기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거짓으로 변하여 혼인하여 주자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 왕검이다. 당요(唐堯) 즉위한 지 50년 경인(庚寅)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아라 하였다. 다시 백악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으니 아사달을 궁흘산이라고도 하고 금미달이라고 한다”고 했다.

 

 하늘에서 신의 아들이 지상으로 내려가서 고조선 단군의 개국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조선의 천손강림(天孫降臨) 개국신화 역사의 뿌리가 되는 가장 중요한 대목들을 8세기초에 일본에서 가져다가 베껴 쓴 내용이 일본 역사책 [일본서기](720)의 개국신화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의 하나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가는 신의 아들이 하늘의 천신에게서 삼신기(三神器)를 받아가지고 땅으로 내려왔다”는 대목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단군 개국 신화에서는 신의 아들 환웅이 천신 환인으로부터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기지고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며 운사(雲師) 등 신들을 거느리며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았던가.

 [일본서기]에 보면 하늘의 천신들을 엮은 [신대](神代)에 하늘나라에서 “신의 아들(皇孫)이 태어났다. 이름은 니니기(아마쓰히코히코호니니기노미코토, 天津彦彦火瓊瓊杵尊)라고 했다. 천신(天照大神, 천조대신)은 니니기에게 곡옥(八坂瓊曲玉)과 청동거울(八咫鏡), 검(草薙劍)이라는 3종의 신기(三神器)를 주고, 모두 5부의 신들을 거느리고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또한 그런가 하면 [일본서기]의 다른 부분에서는 하늘에서 니니기를 지상으로 내려 보낼 때, “천신(高皇産靈尊, 고황산영존)이 신의 아들 니니기(니니기노미코토, 瓊瓊杵尊)에게 붉은 보자기(眞床追衾)를 씌워서 내려보냈다. 내려간 곳은 휴가(日向, 큐슈 동남부)의 다카치호(高千穗)의 구시푸르봉(槵触峰) 봉우리였다”고 했다. 그러므로 신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봉우리로 내려간 것 처럼 역시 다카치호산의 구시푸르봉(槵触峰) 봉우리로 내려갔던 것.

 바로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삼국유사]의 가야 김수로왕 개국 신화의 ‘붉은 끈에 매달린 알 다섯개’도 떠오를 것이다. 또한 구시푸르봉(槵触峰) 봉우리에서는 역시 김수로왕 개국 신화의 구지봉(龜旨峰) 봉우리도 연상할 수 있다고 본다. 그 밖의 여러 가지 우리 고대사와의 유사성은 뒤에서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거니와 이런 일본 역사의 내용에 대해 일찍부터 일본의 순수한 고대 사학자들은 이구 동성으로 [일본서기]가 [조선 상고사]를 모작했다는 사실을 밝혀 우리를 크게 주목시킨다.

 

 

▲ 홍윤기 교수의 민속박물관 특강

 

 

 한국인과 일본인은 모두 단군의 후손이다


 일제가 1945년 8월15일에 2차세계대전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자 미군정하 맥아더 장군의 점령 국가가 된 일본에서는 저명한 사학자며 민족학자, 인류학자 등이 오랜 날을 두고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그동안 그들 각자가 규명해 온 일본 민족사 연구를 당당하게 공개하며 좌담회와 연구회, 토론회 등을 잇대어 열었다. 그것은 흡사 노도와도 같이 일본 역사학계에 선풍을 일으켰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패망은 일단 일본 역사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학문의 자유시대를 활짝 열어준 것이었다.

 

 우선 가장 주목되는 것은 고대 조선 단군왕검의 ‘천손 강림(天孫降臨)의 단군 개국신화와 역시 천손 강림의 ‘가야(伽倻) 건국 신화’ 등등이 일본의 고대 역사인 일본 천손 개국 신화’(日本天孫 開國神話)의 모태(母胎)였다라고 하는 진솔한 역사론들의 잇단 등장이었다. 더구나 그런 연구 발표는 그 당시 제2차대전의 처절한 패전 국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한 때 하나의 큰 충격파가 되기도 했다. 고조선 단군의 개국 역사의 뿌리가 되는 중대한 내용이 일본 개국 역사에 고스란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제치하까지 일본 사학계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일본 고대사학자들의 일본의 잘못된 황국신도(皇國神道)의 역사에 대한 냉철한 비판인 동시에 자아 성찰의 큰 움직임이었다. 두말할 나위없이 일제 강점기까지 황국신도를 내세웠던 군국주의자들이 철저하게 유린해왔던 조선 상고시대와 단군왕검 역사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그 논의였다. 우선 살펴보자면 그 당시 일본의 대표적 민족학자였던 도쿄도립대학의 오카 마사오(岡正雄, 1898~1982) 교수의 다음 같은 연구 발표는 일본인들에게 충격과 동시에 큰 주목을 끌게 되었다.

 “조선의 단군 신화(檀君 神話)를 보면 천신(天神)인 환인(桓因)이 아들 환웅(桓雄)에게 ‘3종의 보기’(寶器, 천부인)를 주어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한 한국 신화를 본 뜬 것이, 일본 신화의 ‘3종의 신기’(神器)였다. 일본 신화는 단군신화와 가야신화를 모태로 삼아 발생했다”(3)라는 단정이었다. 그 뒤를 이어 일본에서는 민족학자 뿐 아니라 역사학자며 신화학자들도 줄지어 올바른 한일 고대관계사의 역사 이론을 내놓게 되었다.

 

 뒤이어 오카 마사오 교수는 다시 1950년대에 일본 역사학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일본민족의 기원](4)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한일 고대 개국 신화를 주도 면밀하게 비교 연구하여 일본의 개국신화가 조선으로부터 형성되었음을 분석해내므로써 일본 민족사학자로서 각광받게 되었다.

 

 

▲ 열강중인 홍윤기 교수의 민속박물관 특강

 

 

▲ 오키 마사오 교수

 

 에도막부(1603~1867)라는 봉건 전제 무장(武將) 지배의 국가 체재로부터 벗어나 서구의 근대 문화를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9세기 후반) 이래, 줄곧 군국주의 강압에 짓눌려 숨막혀 왔던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2차대전 패배와 더불어 사상의 자유라는 새로운 역사시대 전개는 지금까지 그들의 뇌리에 깊쑥이 박혀온 일제 군국주의 황국신도(皇國神道) 역사관이라는 어제까지로부터 이제 현실은 180도 전환하는 새로운 역사적 국면과의 조우였다. 머지않아 일본인들은 그런 전환기의 파동에서 서서히 벗어나, 이성으로서의 새로운 ‘한일관계사(韓日關係史)’의 밝은 눈도 뜨기 시작했다. 물론 그 당시 일본 개국신화가 단군 개국신화며 가야 김수로욍 개국신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여러 저명 학자들의 빈번한 학술회의 등을 통하여 발표되는 단호한 연구와 주장에 대하여 비방하는 의견도 나타났다. 도호쿠대학(문화인류학) 이시다 에이이치로(石田英一郞) 교수는 “1956년 6월23일, 일본학술회의의 주최로 일본인의 기원에 대한 학술회 강연(전문 분야 연구 발표)에 뒤이어 경계영역토론회가 학술회 강연장에서 열렸다”고 전제하면서 “일본인의 기원이라는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 자체가 학문적으로 보아 무의미한 노릇이라던가 오늘의 지식으로는 문제가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무의식적이라 하더라도 여러 학자들 속에 잠겨있는지도 모른다”(4)고 밝히면서 그 당시 일부 학자의 반론도 있었으나 그 후 잠잠해졌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일본 학자들의 일본민족의 기원론이 한창이던 바로 그 무렵 조국 해방을 맞았다고 기뻐하던 한반도의 상황은 어떠했던가. 청천벽력 같은 국토의 분단은 단군 이래 우리 민족 역사상 새로운 비극과의 참담한 직면이었다. 북위 38도선으로 남북이 동강난 국토를 사이에 두고, 날로 우심한 미소간의 힘겨루기 속에서 좌우 사상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 더구나 1950년 6.25 동란 와중의 전란에 허덕이게 된 한국인들에게는 일본 역사 학계의 ‘단군 신화의 일본 개국(開國) 모태설(母胎說)’이 제대로 들려올 리 없었다. 설령 그런 획기적인 새로운 역사론이 한반도에 제대로 알려졌다손 치더라도 결코 그것은 큰 관심의 대상조차 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처참한 삶과 죽음앞에 직면한 절박한 전쟁 불구덩이 속에서 한국 민족사의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상고시대(上古時代) 역사라는 과거의 책장을 넘기고 있을 만큼의 시간적 공간적 여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표적 민족학자 오카 마사오 교수는 1924년 도쿄제국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민속학자 야나기타 쿠니오(5)와 함께 민족학 연구지(硏究誌)인 [민족]([民族])을 공동 편집했고, 1929년 오스트리아의 빈대학으로 유학하여 빌헬름 쉬미트 교수 밑에서 민족학을 수학하고 1933년에는 이 대학에서 ‘민족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카 마사오 교수의 박사 학위 논문 [옛일본의 문화층]([古日本の文化層](6)이라는 학위 논문은 일본의 선사 시대의 고고학, 언어학, 종교학, 형질인류학, 신화학을 바탕으로 하여 일본의 기층 문화를 냉철하게 연구 규명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우리에게 가장 주목되는 단군의 개국 신화가 일본 개국 신화의 모태였다는 신화학적인 고대 일본 역사의 시원을 당당하게 규명했다. 이 논문의 학문적인 경향은 그 당시 오스트리아 빈학파 민족학의 연구 수법을 기본으로 답습한 선진적인 신선한 학구 자세였다.

 

 오카 마사오 교수는 그 후 1935년 일본으로 귀국하여 황무지였던 일본 민족학 분야의 새로운 창설자가 되어 학계에 크게 공헌하기 시작했다. 무엇 보다도 그에게 확신을 안겨준 것은 서구의 이성적인 민족학 연구 방법론을 토대로 하여 일본 민족의 기원을 규명하는 일이었다. 그는 여기서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 민족의 주체가 되었다는 한일 양국 관계사의 발자취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고대 조선의 단군 신화로부터 일본 민족 문화 발생 과정을 명확하게 규명했다. 그러면 여기서 좀 길지만 오카 마사오 교수가 단군 신화 등 조선 민족 신화가 일본 개국 신화로 전입된 보다 구체적인 연구 내용 일부를 그의 공저 논술(7)에서 직접 그대로 번역하여 옮겨본다.

 

  “일본 신화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는 신격(神格)은 아마테라스(天照, 이하 천조, 천조대신을 가리킴)라 생각이 된다. 사실 천조는 황실의 조신(祖神)으로서 현실적인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본 신화 연구에 있어서 가장 이상한 것은 최고의 인격신(人格神)으로서 신화속에서 활약한 신은 반드시 천조 한사람이 아니며, 이 신과 나란히,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뛰어나게 활약한 다카미무스비(高皇産靈, 이하 고황산영, 흔히 高皇産靈尊으로 씀)이다. 그러나 종래 신으로서 고황산영의 존재를 등한하게 취급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일본 신화에 있어, 최고 명령의 신으로서 활약한 신은 천조와 고황산영이라고 알고 있으나 ‘중원(中原) 국가 평정(平定)’의 신화에 대해서 지적하자면, [고사기]([古事記] 712)에서는 천조와 고황산영은 서로 나란히 흡사 한사람의 신처럼 명령을 내리고 있고, [일본서기](720) 본문에 보면 명령을 내리는 것은 고황산 한사람만이 활약하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의 제2, 제4, 제6의 이설(異說) 전승(傳承)의 기사에서도 마찬가지로 고황산영 혼자서 명령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천조 혼자서 주신으로서 명령하고 있는 대목은 [일본서기]의 제1 이설(異說)에서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