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암 장영주 作.

 

“조선수군을 만나면 도망치라.”
왜장 와끼자카의 일본 수군이 한산도에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에 패몰하고 대다수가 수장되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휘하 장수들에게 내린 명령이다. 천 여 척의 전선에, 10만의 병력으로 압도적인 전력 차이임에도 연전연패하니 굳이 이순신 함대와 접전하여 더 이상 패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 처한 이순신 장군 역시 한산도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좁은 물목을 틀어쥐고 현존 함대 전략으로 일본 수군의 자유를 빼앗고 있다.

그곳이 통영이다.
통영은 아름다운 절경과 맛깔스런 음식과 강렬한 개성으로 유명한, 유엔이 인정한 지속 가능한 평생 교육의 도시이다. 그러나 통영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넘은 거룩함과 위대함은 한산대첩에 있다.

이순신 장군이 견내량에서 왜군의 쾌속 승승장구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지 않았더라면 지금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고 일본의 지도는 한반도로 확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왜의 육군은 지상에서 연전연승을 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의 너무나 빠른 승리 즉, 뒤집어 말하자면 너무나 빠르게 허물어진 조선의 육군 탓에 전선이 길어져 보급에 애를 먹고 있던 터였다. 그나마 진격로 상에 있던 조선의 관아에서 입수한 환곡이 아니었다면 아예 버티는 것 자체가 무리였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며 호남과 경상좌도의 관군이 보급로를 위협해 오고 있었다.

맑은 날 부산포에서 300석의 군량미를 싣고 보급선을 띄우면 3, 4일 후에는 인천이나 노량진에 닿아 한양의 왜군을 배불리 먹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함대에 의하여 서해가 막혀 있으니 우마차를 이용해 육로로 수송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임진년 말, 경상좌도는 초유사 김성일의 활약으로 거의 회복하고 있었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크게 일본군을 압박한다. 그렇지 않아도 길어진 보급로는 왜군에게 큰 피로감을 주고 있었다. 여기에 명나라의 개입으로 평양성까지 다시 잃게 되면서 육전에서의 주도권도 거의 조명연합군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순신 장군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급소를 틀어쥐고 있으니 바로 견내량이다.
견내량(見乃梁), 갯내량이라고도 하는 이 좁은 물목은 거제도와 통영 반도가 만들어낸 긴 수로로서 길이는 약 3km, 폭은 300 ~ 400m의 좁은 해협이다. 이 해협은 부산, 마산 방면으로 항해하는 많은 선박으로 붐빈다. 해협 양쪽 입구에는 작은 섬들이 산재하고 물살이 거셀 뿐 아니라 바다 밑에 암초가 많아 옛날부터 해난사고가 잦았다.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거제도의 폐왕성(둔덕면 거림리)으로 귀양온 고려 의종이 배를 타고 건넜다 하여 지금도 전하도(殿下渡)라 한다. 고려 골이라 불리는 곳에는 고려인들의 무덤이 남아 있고 왕을 모시고 왔던 반씨 성을 가진 장군의 후손들이 지금도 거제시 둔덕면 곳곳에 살고 있다.

1419년 5월, 조선 태종은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해 전군에 비상 소집령을 내려 조선 수군의 주력군을 거제의 견내량에 집결시킨다. 배 227척과 수군 17,285명이 이 좁은 해역에 집결하였다. 견내량은 하루에 두 번 조류에 의해 물살의 방향이 바뀌니 썰물을 기다렸다가 그 물살을 타면 힘들이지 않고 넓은 바다로 나갈 수 있다.

가조도와 칠천도가 있는 괭이바다 쪽에서 통영 쪽으로 썰물이 빠져나갈 때 배를 몰아 한산도, 비진도를 지나 구을비도나 홍도 쪽으로 내려가서 쿠로시오 해류를 타면 힘들이지 않고 대마도로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의 대마도 정벌군은 대마도까지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부산포가 아닌 견내량에 집결했던 것이다.

견내량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가자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이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곡창 호남을 지키기 위해 한산도에 통제영을 차리고 이 곳 견내량을 지켰다.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을 수없이 드나들었을 터이다. 괭이바다나 진해만, 부산포 쪽의 왜군을 치기 위한 출동과 승전고를 울리면서 귀환하실 때에도 거제도 남단을 우회하는 경우를 빼고는 대부분 견내량을 지나 다니셨다.

견내량의 또 다른 이름, ‘갯내량’ 물목은 “한시 때(한 달에 두 번 가장 큰 파도가 일어나는 때. 편집자 주)에는 물이 홍수 진 강물처럼 펄펄 날아간다.”고 할 정도의 격랑의 바다이다. '갯내량'의 '개'는 바다를, '내'는 냇물을 '량'은 기둥처럼 쭉 뻗은 협소한 물길을 말한다. 그러므로 '갯내량'은 바닷물이 홍수 진 강물처럼 흐르는 좁은 수로이니 여기서 해전이 일어난다면 전선이 충돌할 정도의 대혼전이 불가피할 것이다.

적의 배로 뛰어 올라 우세한 칼 솜씨로 백병전을 벌려 승리를 취하는 것이 왜 수군의 주 전략이다. 이에 맞서 아예 접근을 차단하여 포격전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이순신 장군은 이 협소한 물길보다는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를 택한 것이다. 한산해전은 1592년 7월 5일부터 7월 13일까지 견내량에서부터 한산도 앞바다 그리고 안골포 전투를 벌이는 시발점이 되었다. 7월 7일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이끄는 함대 73척이 견내량에 집결하였다. 다음 날 그들은 이순신 장군의 유인전술에 말려 한산도 앞바다로 나가 세계 해전사상 유례가 없는 대 참패를 당하고 만다.

첫 승리인 옥포해전을 비롯해 합포, 적진포, 사천포, 당포, 당항포, 율포, 그리고 마침내 한산대첩까지. “조선수군을 만나면 도망치라.” 이 말은 통영의 갯내량과 이순신의 장졸들, 한민족의 명운이 어우러져 빚어낸 갯내량의 파도를 솟구쳐 울려 퍼지는 영원한 승리의 함성이다.

1919년 4월 10일에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이, 3일 뒤인 4월 13일에는 대한민국 상해 임지 정부가 지구상에 처음으로 탄생한다. 이는 견내량 한산대첩의 승리의 함성 속에서 태어나 것이나 진배없다. 이제, 이 승리의 함성을 뇌리와 가슴에 묻고 어려워하는 이웃을 끌어안고 새로운 한민족의 탄생과 지구경영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한민족의 너른 마음과 창조적 브레인으로 상징되는 황금 거북선 지구함대가 통영에서 발진하여 지구의 하늘을 누빌 것이다.

그러기에 대 통영인 것이다.

글ㆍ그림 : 장영주 국학원장(대행), 한민족역사문화공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