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최 부자 주손인 최염 중앙종친 명예회장.

 

경주 최 부자의 육훈(六訓)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둘째,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다섯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하라.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었던 정신을 본받고 싶다.”며 경주 최 부자에 집중하고 있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부터 마지막 최 부자 최준까지 12대가 300년이 넘도록 부를 이어간 ‘경주 최 부자’의 주손(가문에서 파갈림한 아랫대의 장손) 최염(崔炎ㆍ78) 중앙종친 명예회장을 지난 2월 17일, 서울 종로에 있는 수운회관에서 만났다.

경주 최 부자를 이야기하면서, 그 가문의 경영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육훈(六訓)’을 빼놓을 수 없다.

“옛날에는 흉년에 가난을 못 이겨 흰 죽 한 그릇을 얻어먹고 논을 파는 ‘흰죽 논’도 있었다.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이문을 남기는 것으로, 요즘 말로 적대적 인수합병이라 할 수도 있겠다. 경주 최 부자의 육훈에서 ‘흉년에 땅을 사지 마라.’는 것은 흉년에 땅을 사더라도 제값을 쳐주라는 뜻이다. 땅을 안 사주면 그 사람은 더 빨리 굶어 죽게 된다. 그리고 최 부자는 재산을 1년에 만 석 이상 지니지 못하게 한 가훈 때문에 한 해 들어오는 소작료의 최대치를 만석으로 정해두었다. 그 말인즉슨, 최 부자가 가진 땅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소작인 한 사람이 분담하는 소작료가 적어지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주 최 부자의 '만 석'은 다른 만석꾼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지주가 부자가 될수록 소작농들도 살림이 윤택해지는 윈-윈(win-win) 시스템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최 부자의 경영 철학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인간의 존엄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덕분에 구한말 농민을 극심하게 수탈해 재산을 불린 부자들이 활빈당의 습격을 받을 때에도 최 부자댁은 무사할 수 있었다. 자기 가문만의 철학을 가지고 12대가 부를 이어온 것이 대단하긴 하나, 조선에 인심 좋은 부자가 어디 경주 최 부자뿐이었으랴. 그런데 유독 경주 최 부자가 ‘명가(名家)’로 이름을 떨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구한말, 조선은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조정 관료들은 외세의 야욕 속에 제 앞길 찾기에 급급했고, 수탈을 못 이긴 백성은 동학군이 되어 들불처럼 일어났다. 조정은 급기야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앞에서 곡괭이를 든 동학 농민군은 지리멸렬하고 만다.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대, 최준(崔浚ㆍ1884~1970)은 마지막 최 부자로 남기로 한다.

“당시 동학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대역죄였다. 양반, 노비 할 것 없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주장했으니까. 그런데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선생과 2대 해월 최시형 선생, 모두 경주 최씨다. 3대 손병희 선생은 최시형 선생의 매부였고. 우리 가문은 과객도 후하게 대접하는데, 그들은 일가였으니 오죽했겠나. 최 부자는 물심양면으로 동학운동을 도왔다.”

최시형은 당시 10살이 채 되지 않았던 최준에게 애국심, 부자로서의 책임감을 깨우쳐주었다. 어린 시절의 가르침이 디딤돌이 되어 최준은 전 재산을 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쓰기로 마음먹게 된다. 1918년경 안희제 선생과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명가(名家)된 것은 나라 위해 전 재산을 희사한 때문

“당시 할아버지에게는 두 갈래 인생길이 주어졌었다. 평탄한 만석꾼으로서의 삶과 가시밭길인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할아버지는 후자를 선택했다. 백산무역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 부채를 키우는 척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취체역(取締役)사장(오늘날 대표이사)으로 10년을 자금 마련을 위해 활약한 결과, 온 집안에는 차압딱지가 붙게 됐다.”

당시 조선경제의 식민지 전략을 진두지휘하던 조선식산은행의 두취(頭取, 오늘날 총재)가 최준에게 일정 부분 빚을 탕감해 주는 대신 중추원 '참의' 직을 제안했다. 중추원은 일본강점기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으로 이곳의 참의가 된다는 것은 ‘을사5적’ 다음 가는 친일파가 되는 길이었다. 전 재산을 들여 독립운동자금을 댄 최준을 두 번 죽이는 제안이었다. 이는 조선인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는 경주 최 부자가 몰락하여 민심이 악화하는 것을 막고 그를 친일파로 끌어들이려는 총독부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당시 돈 있는 사람들은 돈을 줘가며 중추원 참의를 하겠다던 때였다. 일제에 대항하며 구국을 외치던 이들도 식민지가 장기화되면서 친일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삶 자체가 불가능한 시기였다. 할아버지의 완고함을 이기지 못한 문중에서 가문의 몰락을 막고자 고육지책으로 종조부(최윤: 최준의 동생)를 참의로 보내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이후 광복이 되었고 최준은 모든 재산을 들여 대구대학(現 영남대학교)을 세웠다. 그리고 후손에게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이 전혀 없을까.

“할아버지가 하신 모든 선택에 대해 나는 크게 공감한다. 나라가 있어야 부자도 있는 것 아닌가. 지금 사람들이 경주 최 부자를 찾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지금 당장 잘 사는 것보다 좀 늦더라도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라를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내놓는 용단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경주시에서는 지금 ‘경주 최 부자 경영사상연구원’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홍익과 애국의 생생한 배움터라고 보기 때문이다. 할 일이 너무 많아 스무 살만 더 젊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경주 최 부자 주손, 최염 회장. 이 민족과 가문이 함께 살아 움직였던 이야기를 하는 그의 눈빛은 어느 청년보다 빛났다. 

<국학신문 3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