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사회과학원에서 공식 간행한 『중국역사지도집』 진(秦)의 만리장성이 평양 근처까지 그려져 있다. <출처: 이덕일 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우리는 식민사관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지 못해 큰 화를 입은 바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이란 이름으로 고조선 초기 유물로 추정되는 홍산문명을 비롯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 상고의 역사를 왜곡해 자국의 역사 속에 편입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통탄할 일은 동북공정의 주요자료가 바로 우리나라 역사학자가 식민사관을 토대로 연구 발표한 위만조선, 기자조선, 한사군 등을 내용으로 연구한 논문이라는 점이다. 스스로 제 발목을 잡은 꼴이다.

그 중 한 테마가 ‘한사군 문제’이다. 국사 교과서의 첫머리에 빈약한 고조선사 중 지도와 함께 당당하게 자리 잡았던 것이 한사군이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식민통치기구 한사군의 이름과 위치는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필수 암기사항이었다. 국사 교과서 첫머리에 식민지 역사를 기재하는 서술방식은 식민지 숙명론을 통해 일본 강점을 정당화하려는 식민사학을 그대로 답습한 형태였다.

고구려 박작성(泊灼城) 위에 중국식으로 후산장성(虎山長城)을 쌓은 중국은 2008년 4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기존의 산하이관(山海關)이 아니라 북한과 인접한 단둥의 후산성”이라고 발표했다. 2007년부터 3년간에 걸친 현지조사를 통해 명나라 때 만리장성의 일부를 찾아냈다며 만리장성의 길이를 2,500km 늘인 것이다. 이어 2009년 3월에는 고구려의 영토였던 지린(吉林)성 퉁화(通化)현에서 진한(秦漢)시대 만리장성 유적이 발굴됐다고 발표했다. 기존의 만리장성의 동단이 산하이관이라는 고고학계 정설을 뒤집고 고구려의 영토였던 퉁화와 단둥까지 동단을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중국의 공식『중국역사지도집(전 8권)』에서 진나라 장성(長城)의 끝이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한반도 내륙까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진나라 만리장성이 평양에서 시작되었다는 학설의 근거가 된 것은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은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이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이 현재의 평양에 있었다.”고 제기한 ‘낙랑군재평양설’과 함께 대두되었다. 중국 『사기』의「태강지리지」에 “낙랑군 수성(遂城)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평양 인근에 수성현과 관련된 지명이 있어야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실제 갈석산은 지금 산하이관이 있는 중국 하베이성 창려현에 있으며 수나라의 『수서지리지』에는 창려현이 본래 수성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병도 교수의 『한국사대관』 에 수록된 동방한사군도. <출처: 이덕일 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낙랑군재평양설을 따랐던 이병도 교수는 『한국고대사연구』의「낙랑군고」에서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이라고 비정하고 싶다.”고 적고 있다. 수안의 수(遂)가 수성현의 수자와 같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였다. 비정(比定)이란 확실하지 않지만 비교하여 정함 또는 다른 유사한 것과 비교하여 그 성질을 추정함이란 뜻이 있다.

처음 황해도 수안을 수성현으로 주장한 인물은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였으나 우리나라 주류사학계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었고, 이것은 중국이 한반도 북부까지 지배했다는 동북공정의 빌미가 되었다. 이병도 교수는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이 되어 10여 년 동안 일했으며 해방 후 서울대 교수, 문교부장관 등을 지냈다. 한국사학계의 태두로 인정받았으나 식민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낙랑군재평양설을 뒷받침하는 주요 유물 유적 중에는 조작의 의혹을 받는 것들이 많다. 2천 년 동안 발견되지 않던 유물들이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은 일본사학자들에게 짧은 체류기간 동안 무려 ‘6번의 우연’을 거쳐 발견되었다. 또한, 한사군의 존재 자체도 초기 기록인 사마천의 『사기』,「조선열전」에는 한사군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고 ‘사군’이라고만 적혀 있고 「흉노열전」에는 ‘이군’이라 했으며 후대 주석에 의해 한사군의 명칭이 구체적으로 기재되는 등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국사 교과서의 한사군 기록은 2002년 7차 교과 과정 개정에 의해 삭제되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의 청소년과 어른들에게 한민족의 역사는 중국 식민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이런 인식이 사라지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하다. 

<국학신문 3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