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국학원 광복의병연구소 주최로 지난 1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는 신흥무관학교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새로운 한·일 관계의 모색'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특별 초청된 네 번째 발표자인 나카오 히로시(仲尾 宏) 일본 교토가쿠게이대학(京都造形藝術大學) 객원교수(오사카국제이해연구센터 이사장)는 작년 5월 10일 한일 강제병합 원천무효 한일지식인 공동 서명자 100명 중 한 사람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일본인의 역사인식 오류’를 주제로 발표했다.

나카오 교수는 <후소사>판 교과서 채택 현황 및 우익 시민단체나 정당의 압력, ‘태평양 전쟁’을 제국주의 용어인 ‘대동아 전쟁’으로 표기하며, 아시아 각국에 대해 저지른 만행을 극히 간단하게 기재한 몇몇 교과서의 서술을 지적했다.

또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애국심을 키울 목적으로 개악한 교육기본법은 일본 학생들에게 우월감을 갖게 하는 반면 일본과 이웃한 여러 민족과의 연대가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교과서를 만든 결과를 가져왔다.”고 적시했다.

나카오 교수는 “일본의 지배층이 세계에 특히 아시아에 대한 개방된 눈높이를 가지고 겸허하게 역사를 반성하며 배우는 자세로 임해야 하며, 한· 일 친선과 아시아 평화를 위하여 잘못된 역사 기술은 바로 잡혀야 한다.”면서 “무엇이 역사 교육에 있어서 ‘공정’과 ‘중립’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표내용 전문>

동아시아에 대한 일본인의 역사 인식  오류
-‘자유주의사관’ 교과서의 뿌리-

1. 들어가는 말
2. ‘자유주의사관’과 ‘후소사’, ‘자유사’의 두 역사책
3. 근대・현대 일본인 지식층・관료 등의 한국・아시아에 대한 역사관과 그 반성

1. 들어가는 말 

 현재 도쿄고등재판소에서  여성 교원 한 분이 도쿄도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있다.  원고인 마스다(増田都子) 씨는 도쿄 치요타구 구단중학교 교사로서 재직 중이었다.  마스다 교사는 지난 2005년에 사회과 역사 교육에 관하여 3학년 학생들에게 나눠준 자료가 “공정하고 중립적인 공교육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키고 있다”라고  법원이 계고 처분한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현재 공소 중에 있다. 게다가  마스다 교사는 이 소송을 제기한 것 때문에 2006년 징계처분을 받고 학교에서 면직됐다. 

마스다 씨가 학생들에게 나눠준 자료는 당시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 앞으로 그녀가 보낸 편지로서, 노대통령이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행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이 입은 피해의 상처가 지금도 아물지 않고 있는 역사적 현실을 시야에 넣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라고 하는 편지에 대한 회신이었다. 즉 재판은 역사 교육에서 ‘공정ㆍ중립’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재판이다.

1997년에 도쿄에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니시오 칸지(西尾幹二)를 회장으로 발족하여 2001년에는 후소사(扶桑社)가 동회의 지도를 받아  작성한 ‘중학교 역사 공민 교과서’가 문부성(당시)의 검정에 합격하였고 극히 일부의 교육위원회에서 이를 교과서를 채택하였다. 뒷날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주요 맴버였던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는 동 모임에서 탈퇴하여 ‘자유사’를 설립하고 신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간행하여 2009년의 검정에 합격했다.

2005년 여름 현재 ‘후소사’ 판 교과서의 채택률은 0.39%, 공민 19%이다. 그러나 도쿄의 스기나미구(杉並区)며 요코하마시(横浜市) 등에서 채택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극히 적다고는 하되, 이런 종류의 교과서 사용을 추구하는 우익 시민 단체며 정당으로부터의 압력이 있으므로 금후로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학부모나 교원들은 이런 교과서 채택에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애국심만이 강조되고 있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제구실을 못한다.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지 않다”. “우리들이 받았던 교과서하고 어디가 잘못된 것인가”. “정치가 애국심을 강요하는 만큼,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 고들 말하고 있다(‘스기나미의 교육을 생각하는 모두의 모임’ 발행 책자에서).
 그런 문제의 발단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역사 교육에 있어서 ‘공정’, ‘중립’인가를 생각하여 보기로 한다.

1. ‘자유주의사관’과 ‘후소사’, ‘자유사’의 두 역사책
  

‘후소사’와 ‘자유사’ 두 교과서의 공통점을 살피자면 다음과 같은 점이다. 그 한 가지는 일본의 전통적 미풍의 상징으로서 천황제의 찬미를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이를테면 ‘후소사’ 판에서는 실재하지 않았던 진무천황(神武天皇)에 관한 ‘일본서기’(720) 역사책 등의 기사들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또한 교토시에서 주니어 대상으로 편집한 부교재 책자에서도 똑같은 기사를 담고 있다. 또한 ‘후소사’ 판에서는 쇼와천황(昭和天皇, 1926~1086 재위)의 전쟁 책임을 일체 묻지 않고 ‘성실한 인격자’, ‘국민과 함께 걸었다’는 따위를 기술하고 있다.

이상은 역사 교과서 내용이나 ‘후소사’의 ‘공민’ 교과서에서는 일본의 헌법에 관한 해설 대목에서 “세습하는 천황을 일본 및 일본국 통합의 상징적 존재로서 정했다. 또한 국민 주권을 구가했다”고 기술함으로써, 천황제의 존재가 마치 일본국 헌법 제1의 중심인 것처럼 보이는 기술이 보인다.

곧 천황의 존재 및 천황제에 대한 일본과 세계와의 관계에 시대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쳐 왔는가? 라고 하는 시각이 전혀 결여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일본의 역사적 전통에 있어 언제나, 어느 시대이건 천황의 존재가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역사의 잘잘못은 별개로 하더라도, 천황 중심에서 움직인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시대들도 분명히 있었다.

또한 문화의 창조도 천황과 그 주변이 항상 중심이었던 것은 아니며 무가(武家), 농민 또는 정인(町人,  소도시 서민), 또는 피차별민(被差別民, 일종의 천민)들이 만들어 온 뛰어난 문화도 오늘에 전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경시하는 하는 것도 ‘공정’ ․ ‘중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제2의 문제점은 ‘도쿄 재판’이다. ‘후소사’에서는 ‘태평양전쟁’ 또는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그 밖의 일반 교과서에서 쓰고 있는 것에 대하여 ‘대동아전쟁’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대동아전쟁’ 이란 용어는 전쟁 중의 일본 제국주의 정부가 썼던 용어이며 아시아의 해방을 위한 聖戦이었다고 그 당시 매스컴이 외쳤던 용어이다.

그러면서 “일본군은 잘 싸웠다. 국민들은 곤란 속에서도 전쟁의 승리를 원했다.” 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 반면에 일본이 아시아 각국에게 대하여 저지른 만행에 대한 기술은 극히 적으며, 또한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의 참담했던 전쟁 피해에 대한 기술도 간단하게만 서술되어 있다. 즉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본 일본의 가해와 피해를 직시하지 않고 있다.

“도쿄 재판은 승리한 연합군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면적(一面的)인 재판이었다” 라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그 ‘일면적’이었다고 하는 내용을 둘러싼 의견의 차이는 있다. 당시의 변호인단은 그 전쟁은 ‘자위전쟁(自衛戦争)’이며, 재판은 그 당시까지는 국제법에 없었던 ‘평화’, ‘인도(人道)’에 관한 죄 등 ‘사후법(事後法)’으로 처벌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 전쟁이 ‘자위전쟁’이었다는 주장은 일본인들 중의 일부에서는 긍정되더라도 ,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긍정 받을 수 없는 것이리라. 또한 사후법이라는 비판 자체도 본래 만고불역(萬古不易)의 국제법이 존재했던 까닭도 없으며, 시대에 의하여 정비되거나 부가되어 온 역사를 고찰한다면, 이 재판이 제기한 법리는 국제적 이념으로서 수용되어 마땅하리라 본다. 

문제는 쇼와천황이 소추(訴追)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에 의하여 그의 전쟁 책임이 불문에 붙여진 사실과 또한 아시아 피해 침략의 대표가 조치되지 않았다는 것에 의하여,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의하여 발생한 여러 가지 잔학 행위가 일부를 제외하고는 문책되지 않았다는 일이다. 이를테면 소위 ‘강제노동 강제 연행’의 책임이며 ‘정신대(挺身隊)’로서 징발된 한국이나 중국 여성들의 성적 피해가 취급되지 않았다는 일이다.

총괄적으로 지적하자면 일본의 근대가 ‘부(負)의 역사’(역자주: 잘못한 역사)를 걸머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가능한 한 희박하게 만들려고 노린 것이 이들 역사책의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런 목적으로서 그들에 대한 비판에 ‘자학사관(自虐史観)’이니 ‘반일사관(反日史観)’ 등등을 내세우는 감정적 딱지를 붙이려는 데 치중되고 있다.  ‘공정’, ‘중립’이라고 주장한다면 ‘부(負)의 역사’도 직시하여 거기서 배워야만 할 것을 기술하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본다.

2. 근대․현대 일본인 지식층․관료 등의 한국․아시아에 대한 역사관과 그 반성

일본 근대의 유수한 지식인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는 1885년에 ‘탈아론(脱亜論)’을 써냈다. 그 속에서 그는 ‘후진 지나(支那, 중국)와 조선’은 ‘악우’(悪友, 못된 친구)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서양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하며 그 지나 조선을 접하는 법도 이웃 나라라 하여 특별하게 대면(인사)할 것이 못되며, 실로 서양 사람들이 이들을 접하는 식을 따라서 처리할 것 뿐이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가 지원하고 있었던 한국의 김옥균(金玉均, 1851~1893)의 쿠데타(역자주: 1884년 갑신정변)가 실패한 뒤의 감상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그 후 후쿠자와 유키치가 내세운 대로 서양 열강의 뒤를 쫓아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고, 아시아 침략의 길에 나섰다.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 1862~1933)는 1910년 ‘한국병탄’ 직후 그는 교장직에 있던 구제제일고등학교 입학식에서 “일본은 유럽의 나라들보다도 더 큰 나라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천재일우”의 찬스(기회)를 잡았다고 했다.

그 뒷날 그가 말한 ‘찬스’를 살려서 한국 국토를 발판으로 삼고 아시아 대륙 침략을 전개했다. 제2차대전 후 뒷날에 한국과 일본의 조약 교섭에 있어서 내각 관방장관을 지낸 자민당의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悦三郎, 1898~1979)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처럼 말했다.

 “일본이 메이지 시대(1868~1912)이래로 이와 같이 강대한 유럽 제국주의의 이빨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여 만주 땅에 오족공화(五族共和)의 꿈을 맡긴 것이 일본제국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 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일회담 수석대표였던 다카스기 신이치로(高杉晋一郎)는 회담중에 “조선에 대한 지난날의 통치에 대하여 일본이 사과하라는 말도 있으나 일본으로서는 말할 것이 아니다. 일본은 분명히 조선을 지배했다. 그러나 일본은 좋은 일을 하려고 해서 조선을 보다 나은 것으로 하려고 했던 것이다. (중략) 일본의 노력은 결국 전쟁에서 좌절하고 말았으나, 20년 정도만 더 조선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다.”

이것이 1953년부터 1965년에 걸쳐 일본 정치 외교의 중추에 있었던 인물들의 한국에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솔직한 의견이다. ‘자유주의사관’에 입각한 사람들은 사실은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며, 니토베 이나조처럼 ‘아시아의 패권’을 독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는 교육기본법을 개악하여 애국심을 키우겠다는 교육기본법을 삼았다. 

그 주지는 일본 아이들에게 “우월감을 갖게 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국의 우월사관이나 그와 같은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천황에 대한 찬양, 일본적 전통을 중시해야 하며, 그 대신에 이웃 여러 민족과의 관련의 소중함에 대해서는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그런 교과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자유주의사관’의 입장에 서있는 교과서는 그와 같은 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효과 있는 교과서이리라. 그래서 다른 민족과 그 문화를 존중하며 근대 일본이 걸어온 ‘잘못의 역사’로부터 깨우치려고 하지 않는다.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 한국인을 비롯하여 외국인과 그 아이들에 대한 따사로운 마음이 일체 없다. 이와 같은 교육이 일본의 주류가 되었을 때, 일본은 어떤 모양으로 변모하여 갈 것인가. 또한 한국을 비롯한 해외 각국 사람들에게 대한 눈높이는 어떤 식으로 변하여 갈 것인가. 실로 암담하기 그지없는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과는 반대로 일본의 지배층이 더욱 세계에 특히 아시아에 대한 개방된 눈높이를 가지고 겸허하게 역사를 반성하면서 인권 감각이 넘치는 보다 훌륭한 시민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상호간에서 겸허히 반성하고, 배우는 자세를 취할 때, 일본과 한국인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날이 반드시 올 것을 확신하고 싶다.


【原 文】

東アジアに対する日本人の歴史認識の誤謬 
-「自由主義史観教科書」の根にあるもの-

仲尾 宏

はじめに
現在東京高等裁判所で一人の女性教員が東京都教育委員会を相手に訴訟を起こしている。原告増田都子さんは東京都千代田区九段中学校教諭として在職しているが、2005年に社会科歴史教育に関して3年生に配付した資料が「公正、中立に行われる公教育への信頼をそこなう」として戒告処分を受けた一審判決を不服として控訴しているものである。

さらに本人はこの訴訟を提起したことで2006年に懲戒免職処分を受けた。

増田さんの配付した資料とは韓国のノ・ムヒョン大統領(当時)宛に彼女が送った手紙で、それは同大統領の「日本が朝鮮に対して行った侵略と植民地支配によって韓国民衆が負った被害の傷は今も癒されていない歴史的現実を視野に入れてほしい」という日本人に対する要望に対する返書であった。すなわち歴史教育において「公正・中立」とは何か、が論じられる裁判である。

1997年に東京で「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が西尾幹二を会長として発足し2001年には扶桑社が同会の指導のもとに作成した中学校歴史・公民教科書が文部省(当時)の検定に合格してごく一部の教育委員会で採択された。のち「つくる会」の主要メンバーであった藤岡信勝が同会から脱退して「自由社」を設立、「新編新しい教科書」を刊行して2009年に検定に合格した。2005年夏現在の「扶桑社」版教科書の採択率は歴史0.39%、公民0.19%である。しかし東京都杉並区や横浜市などで採択、使用され、ごく僅かとはいえ、この種の教科書の使用を求める右翼市民団体や政党からの圧力があり、今後も注視する必要がある。多くの保護者や教員はこれらの教科書の採択には否定的である。その理由は「愛国心のみが強調され,偏っている。」 「役に立たない。子どもには読ませたくない。」 「私達が受けてきた教科書のどこがだめなのか?」 「政治が愛国心を強要するときほど、おかしな方向へ向いている」とのべている。(「杉並の教育を考えるみんなの会」発行のリーフレットより)

 そこでこの問題の発端はどこにあるのか。何が歴史教育にとって「公正」 「中立」であるのか、を考えてみることにする。

「自由主義」 史観と 「扶桑社」 「自由社」ふたつの教科書。
「扶桑社」 「自由社」ふたつの教科書に共通している記述は次の点にある。
その一つは日本の伝統的美風の象徴として天皇制の賛美を強調していることである。
たとえば扶桑社版では、実在しなかった「神武天皇」にかかわる󰡔日本書紀󰡕などの記述をながながと書いている。また京都市がジュニア向けに副読本として編集した冊子でも同様の記述がある。また扶桑社版では昭和天皇の戦争責任は一切問わずに「誠実なお人柄」 「国民と共に歩む」などの記述がある。以上は歴史教科書であるが、同社の「公民」の箇所には日本国憲法の解説として「世襲の天皇を日本および日本国統合の象徴と定めた。さらに国民主権をうたい.…」とのべ、天皇制の存在が日本国憲法の第一の柱であるかのような記述がみられる。つまり時々の天皇や天皇制が日本と世界とのかかわりにおいて、時代にどのような影響を与えてきたか、という視点が全く欠如していることが特徴である。また日本の歴史的伝統の中心にいつの時代も天皇の存在があった、ということを強調している。しかし日本の歴史はよし・悪しは別として天皇中心に動いていた時代もあればそうでない時代もあった。また文化の創造も天皇とその周辺がいつも中心であったわけでもなく武家、農民や町人、また被差別民が作ってきたすぐれた文化も今日に伝えられている。これらの史実を軽視することは「公正・中立」といえるだろうか。

第2の問題点は「東京裁判」である。扶桑社版では「太平洋戦争」または「アジア太平洋戦争」とその他の一般教科書で書かれていることに対して「大東亜戦争」という呼称を用いる。この呼び方は戦争中の日本帝国政府が用いており、アジア解放のための「聖戦」であったと当時のマスコミは呼びかけていた時の用語である。そして日本兵はよく戦った、国民は困難の中……戦争の勝利を願った、と述べてある。その反対に日本がアジア諸国にして来た事の記述は少なく、また沖縄や日本本土の惨憺たる戦争被害の記述も簡単である。 つまり市民の目線からみた日本の加害と被害の歴史を直視していないのである。

東京裁判は勝利した連合国による一面的な裁判であった、ということは多くの人びとに共通している認識である。しかしその「一面的」だった、という内容をめぐって意見の違いがある。当時の弁護団はあの戦争は「自衛戦争」であり、裁判はそれまでの国際法にはなかった「平和」 「人道」に対する罪など「事後法」で処罰した、という批判をした。しかしあの戦争が「自衛戦争」であったという言説は日本人の一部では肯定されても、世界の大多数の人びとは肯定しえないであろう。また「事後法」という批判ももともと万古不易の国際法が存在していたわけでもなく、時代によって整備・付加されてきた歴史を考えるならば、この裁判が提起した法理は国際的理念として受容されるべきものであろう。問題は昭和天皇が訴追されなかったことにより、彼の戦争責任が不問のままであったこと、またアジアの被侵略国の代表が招致されなかったことにより、日本のアジアにおける侵略の結果生じた数々の残虐行為が一部を除いて問われなかったことである。たとえば、所謂「強制労働・強制連行」の責任や「挺身隊」として徴発され韓国や中国などの女性の性的被害が取り上げられなかったことである。総じていえば日本の近代が「負の歴史」を背負っている、ということをできるだけ薄めることが彼らの教科書の主要なポイントである。その行く先として彼らに対する批判に「自虐史観」 「反日史観」などという感情的なレッテルを張りつけることに終始してしいる。「公正」 「中立」をいうならば、「負の歴史」も直視して、そこから学ぶべきことを記述の中にとりいれるべきである。

近代・現代日本人知識層・官僚などの韓国・アジアに対する
歴史観とその反省
日本近代有数の知識人であった福澤諭吉は1885年に『脱亜論』を著わした。その中で彼は「後れた支那(中国)朝鮮」は「悪友」であると位置づけた。そして「西洋の文明国と進退を共にし、その支那朝鮮に接するの法も隣国なるがゆえにとて特別の会釈(挨拶)に及ばず、まさに西洋人がこれに接するの風に従って処分するのみ」とのべた。これは彼が支援していた韓国の金玉均のクーデターが失敗に終わったあとの感想である。そして日本はこの後、福澤ののべた通り西洋列強のあとを追って帝国主義国となり、アジア侵略の道をつき進んだ。新渡戸稲造は1910年「韓国併合」の直後、校長をしていた旧制第一高等学校の入学式で「日本は欧州の国々よりも大国になった」といい、「千載一遇」(めったにない好機)のチャンスであるとのべた。そののちの日本は彼の言った「チャンス」いかして韓国の土地を足場として、アジア大陸などへの侵略を展開した。第2次大戦後ののち、韓国と日本との条約交渉において、内閣官房長官をつとめた自民党の椎名悦三郎はその著書の中で次のようにのべた。「日本が明治以来、このように強大な西欧帝国主義の牙から、アジアを守り、日本の独立を維持するため、台湾を経営し、朝鮮を合邦し、満州に五族共和の夢を託したことが、日本帝国主義というのなら、それは栄光の帝国主義」」であると。そして日韓会談の首席代表であった高杉晋一郎は会談の中で「朝鮮に対するかつての統治に対して日本が謝れという話もあるが日本としては言えたものではない。日本は明らかに朝鮮を支配した。しかし日本はよいことをしょうとして、朝鮮をよりいいものにしようとしてやったことである。(中略)日本の努力は結局戦争で挫折してしまったけれども、もう20年くらい朝鮮をもっていたらよかった」

いずれも1953年から1965年にかけて、日本の政治・外交の中枢にいた人物たちの韓国への「植民地支配」にたいする率直な意見である。「自由主義史観」にたつ人びとは、ほんとうはこのようなことを言いたいのではないだろうか。また福澤諭吉や新渡戸稲造のように「アジアの覇権」を独り占めしたいのではないだろうか。安倍晋三元首相は教育基本法を改悪して、愛国心を育てる教育基本法とした。その主旨は日本の子どもたちに「誇りをもたせる」ことにあるという。まさに自国優越史観である。そのような教育を実現するためには天皇制の賛美、日本的伝統の重視、そして近隣の諸民族との関わりの大切さを子どもたちに教えない教科書を必要としている。「自由主義史観」の立場にたった教科書はそのような教育を実施するために有効な教科書であろう。そこからは他の民族とその文化を尊重し、近代の日本がたどった「負の歴史」から学ぼうとしない。日本にいる在日コリアンをはじめとする外国人とその子どもたちに対する温かい気持ちは一切ない。このような教育が日本の主流となったとき、日本はどのように変貌していくのだろうか。また韓国をはじめとする海外の人びとに対する目線はどのように変わっていくのであろうか。まことに暗澹たる気持ちにならざるをえない。それとは逆に日本の支配層がもっと世界に、とりわけアジアに対してもっと開かれた目線をもち、謙虚に歴史を反省した上で人権感覚にあふれたよりよい市民社会をつくるために、お互いから学びあおう、という態度をとった時、日本人と韓国人は心から友好的な関係をもつことができるだろう。そのような日が必ず来ることを確信したい。(おわり)

* 나카오 히로시(仲尾 宏, なかお ひろし)1936년생. 同志社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졸업. 전근대 한일관계사 전공. 저서로는 󰡔조선통신사와 도쿠가와 막부(朝鮮通信使と徳川幕府󰡕 외 다수가 있다. 교토조형예술대학 교수를 거쳐 동대학 객원 교수, (재) 세계인권문제연구센터 이사, (사) 오사카국제이해연구센터 이사장, 국제재일한국조선인연구회 공동대표에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