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국학원 광복의병연구소 주최로 지난 1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는 신흥무관학교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새로운 한·일 관계의 모색'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두 번째 발표자인 김동환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이하 UBE) 교수는 '일제하 항일운동 배경으로서의 단군의 위상'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김 교수는 "일제하 항일운동에서 단군의 의미는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총체적 저항의 출발이자 중심이며, 항일운동의 총본산으로서 양적 질적으로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했다.

또한 "신흥무관학교를 주도한 이회영, 이시영, 이상룡, 이동녕 역시 단군정신으로 무장한 투사들이었으며 당시 만주의 한국인은 모두 단군 자손이라는 민족의식이 강하게 퍼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독립운동의 정신적 배경으로서 단군정신과 단군구국론(檀君救國論)은 항일투쟁의 과정에서 종교나 이념을 초월하여 단군정신으로 합심하였다.
이는 단군정신의 궁극적 지향점인 홍익인간이라는 철학적 속성 자체가 '너와 나'가 아닌 '우리'를 지향하며, '닫힌사회'를 넘어 '열린사회'를 도모하는 것이며, '끼리 만 사는 가치'가 아닌 '더불어 사는 가치'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근자에 회자되는 민족에 대한 세계주의적 해석의 가능성도 열어두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발표내용 전문>

일제하 항일운동 배경으로서의 단군의 위상

 1. 들어가는 말

“아아! 우리나라의 사람들이 만약 신인(神人)이 태백산 단목하에 강림하였다는 한 줄의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갈천씨(葛天氏)의 백성이 되거나 무회씨(無懷氏)의 백성이 되었을지, 나 자신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만약에 환인상제의 말이 전함이 없고, 마니산의 제천행사가 없었더라면, 우리들도 또한 시(詩)․서전(書傳)과 신ㆍ구약에서 말하는 것에 의존하였을 것이다. 이익ㆍ정약용 두 선생의 종교론(宗敎論)과 삼신설(三神說)이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또한 통털어 선교(仙敎)라고만 칭하고 영원히 무당들의 손에서 더럽혀졌을 것이다.”

일찍이 예관 신규식이, 우리 민족에게 단군에 관한 기록이 없었다면 한국인은 한민족으로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 말이다. 이것은 단군이 우리 민족 정체성의 상징인 동시에, 단군이 근대 한국인들에 있어 한민족 공동운명체 형성의 중요한 매개체였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사에 있어 단군은 민족 구난(求亂)의 상징적 존재였다. 단군구국론이란 바로 이러한 의식을 통해 민족의 위난을 극복코자 했던 우리의 정서를 말한다. 단군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던 불가(佛家)의 일연이 쓴 ≪삼국유사≫나 유가(儒家)의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 실린 고조선과 단군사화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주적 역사의식의 발로였다는 점을 우리는 경험했다.

고려 공민왕이 요동정벌의 명분을 단군조선에서 찾은 것이나, 조선왕조의 ‘조선’이란 국호 역시 이러한 정신의 계승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조선조 단군존숭의 전통이 우리 민족 정체성 확인의 발로라는 것도 이미 확인된 바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정신을 무시하고 존화사상에 심취한 정통성리학자들에 의해 단군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기자숭배만이 전부로 알았던 그들은, 단군조선이야말로 이풍(夷風)을 벗지 못한 저열한 문화단계로 보았고 중국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한 비합법적인 국가로 매도했다.

성리학자들의 기자숭배는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명에 대한 보은(報恩) 관념으로 존화양이의 정서는 한층 굳어져, 명이 멸망한 후에도 우리만이 유일한 중화국가임을 자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양란 이후 기층사회에 고개를 든 단군숭배의식은 사회 저변에서 일어났다. 즉 단군을 중심으로 한 주체적 역사의식을 통해 우리의 자주성에 눈뜨고자 했던 반존화주의 열망이 폭발한 것이다.

도가(道家)에 의해 주도된 조선후기의 단군숭배는, 단군을 우리나라 도가의 종주로 추앙하면서 단군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하였다. 특히 실학자들에 의한 단군과 상고사의 연구는, 실존하는 단군의 의미를 더욱 고양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상고사의 지평을 넓히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은 몰론, 중화의식에 함몰된 자아의 각성에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한말 단군신앙의 등장 역시 이것과 무관치 않다. 전래의 고신교(古神敎)인 단군신앙의 중흥을 내걸고 출발한 홍암 나철의 명분이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나라는 망했지만 정신은 존재한다)’이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일제하 독립운동의 정신적 동력이 되었던 이 외침은, 정신의 망각으로 망한 나라를 정신의 지킴으로 되찾자는 구호였다. 그 정신이 바로 단군이요, 그 단군정신이 곧 대종교였으며, 그 대종교가 바로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선 것으로, 단군구국론의 재확인이었던 것이다.
박은식은 “국교(國敎)와 국사가 망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강하게 외쳤다.
신규식은 선조들의 교화와 종법, 그리고 역사를 잃어버림이 망국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신채호 역시 단군시대의 선인(仙人)을 국교(國敎)이며 민족사의 정화로 보고, 이것을 계승한 화랑을 종교의 혼이요 국수의 중심이라고 강조했다.
이들 모두 단군정신의 영향 속에서 이와 같은 의지를 잉태시킨 것으로, 단군구국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2. 일제하 항일운동 배경으로서의 단군의 위상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한일병탄은 우리 민족사의 최대 수치요 비극이었다. 그들은 한반도의 무력지배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대륙진출의 전초기지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특히 일제는 조선의 영구지배를 획책하기 위해 다양한 술수를 동원하여 한민족의 정체성을 교묘하게 흔들어 놓았다. 그 중에서도 식민사관을 통한 한국사의 날조와 일본어 국어정책을 통한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탄압은, 한민족성의 근간을 없애고 민족문화의 근원을 훼손시키기 위한 일제의 주요술책이었던 것이다.

일제하 단군신앙의 등장은, 이러한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총체적 저항의 출발이자 중심이었다. 단군신앙의 부활 선언인 <단군교포명서>야말로 이와 같은 총체적 저항의 교본으로써, 문화적 위기에 당면해 있던 당시 민족사회에 희망의 지침서와 같은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즉 <단군교포명서>는 우리 정신사에 변곡점이 되는 선언으로써, 단군사상의 가치를 종교․사상․문화적 측면에서 역사적인 구명을 함은 물론, 시대를 건너 뛴 단군신앙의 승계를 선언한 중차대한 선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단군신앙의 부활을 넘어서, 민족 최대의 축일인 개천절의 당위적 명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토대로 한 정신사관 확립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전래적 인습이었던 사대(事大)의 정신적 폐해를 공박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심어줌과 더불어 국권회복을 통한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분명하게 일깨웠다. 일제하 대종교의 교당이 곧 학교이면서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는 등식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했던 나철의 독립운동 또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요소들을 포괄하는 정신(道․단군사상)을 토대로 운용되었다. 나철이 강조하는 정신을 몸통으로 하여 문화․정치외교․종교․사상․무력투쟁 등을 쓰임으로 하는 총체적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즉 대종교의 등장은 단군신앙의 부활이라는 종교적 명분과 함께 민족의 성지인 배달국토를 되찾아야 한다는 국권 회복적 명분이 동시에 작용했던 것이며, 그러한 정신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근거가 <단군교포명서>요, 나철의 ‘국수망이도가존’이라는 민족적 경구였다.

이러한 단군의 열기는, 1921년에 이미 대종교의 신자가 30만 명에 달했다는 일본 학자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즉 조선 내에 3만 1천 명, 동간도(東間島)에 10만 3천 명, 서간도에 3만 5천 명, 그리고 북간도와 노령 지역에 11만 7천여 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해방 후 애국동지원호회(愛國同志援護會)에서 펴낸 독립운동사에서 여러 종교 가운데, 대종교를 가장 먼저 언급한 것도 이러한 경험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시경․지석영․김두봉․이극로․최현배 등으로 대표되는 한글운동의 배경이나, 김교헌․박은식․신채호․유근․정인보․안재홍․이상룡 등 민족주의사학의 바탕, 그리고 신규식․이동녕․이시영․박찬익․조성환 등의 활동으로 조성되는 정치․외교적 항쟁, 그리고 안확․나운규․이회영․박일병․권오설․홍명희 등의 문화․사상투쟁의 토대에도 대종교라는 정신적 배경이 뒷받침되었다. 또한 중광단․북로군정서․신민부․흥업단․광정단․한족연합회 등등 무장항일운동의 배경에도 교학일여를 통한 군교일치의 단군정신이 지탱하고 있었다.

특히 단군신앙의 총체적 항일운동의 배경에 있어, 단군신앙을 다시 일으킨 나철을 비롯한 김교헌․서일․윤세복 등, 이 네 사람의 정신적 영향력은 실로 지대했다. 그것은 그들이 단군정신을 상징하는 인물들로서, 수많은 교도들을 거느리고 그들 스스로가 개인의 영달과 명예를 뒤로 한 채, 멸사봉공을 통한 살신성인의 길을 기꺼이 걸어갔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무장투쟁 배경으로서의 단군

일제하 대종교 항일운동의 금자탑은 역시 무장항일운동이다. 이것은 비단 우연히 얻어진 승리와 영광만의 기록이 아니다. 10만 여명이 희생을 치른 비극의 역사요, 피의 역사로도 대변된다.

1911년 만주 최초의 독립운동단체인 중광단 조직을 효시로 대한정의단으로 그리고 북로군정서로의 발전, 신민부로의 계승과 한족연합회로의 단결, 또한 흥업단 발족에서 광정단, 그리고 정의부의 성립, 그리고 서로군정서․통의부․참의부․의열단․광복단에서의 활동까지, 영욕과 부침(浮沈)이 교차하는 가운데서도 불굴의 의지로 투쟁과 승리의 길을 개척해온 업적은 민족운동사에 고귀한 발자취였다.

대종교의 사회․문화적 유속(遺俗)으로서, 대종교를 일으킨 나철이 금과옥조로 지키라고 유언한 구서(九誓:아홉맹세)나 오계(五戒:다섯계율)의 내용에서도 투쟁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구서를 보면 ‘충성하지 않는 이는 내치라’는 항목과 ‘환란을 구원하라’는 맹세, 그리고 오계에 나오는 사군이충(事君以忠)과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은 조국의 위기에 임해야 할 국가구성원 개개인의 자세를 경계하는 것이다.

안재홍은 이러한 오계의 정신을 군인정신(軍人精神)의 지보(至寶)요 국민정신의 정화(精華)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정신이 신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백제의 상무정신(尙武精神)과도 연결됨을 밝히고 싸움에서의 용기만을 앞세움이 아닌 정의롭고 도덕적인 군인정신을 일깨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철학을 가진 싸움을 말한다는 점에 주목되는데, 안재홍은 이 정신이 대종교 정신과 연관됨을 밝히면서 반항투쟁․독립자존의 숭고한 이념임을 분명하게 단정을 한다.

한편 대종교의 경전 노래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원본(原本) 신가(神歌:얼노래)가 있다. 그 전래 내력에 대해 고사기(古事記)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高句麗의 祭時에 此曲을 常歌하고 또 臨陣時에 士卒이 歌하여 써 軍紀를 助하였다.”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얼노래’ 가사의 중심내용은 대황조(大皇祖:한배검)의 업적을 잊지 말고 참마음의 화살로 악한 마음의 과녁을 맞추어 버리듯 광명정대하게 살고자 함을 대황조(한배검)에게 맹세하는 것이다. 또한 ‘얼노래’는 종교적 의식의 노래로 쓰임과 동시에 군인(軍人)들에게는 사기를 북돋는 노래로 사용되었음을 볼 때, 군교일치(軍敎一致)의 전형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노래는 개인적으로는 수심(修心)의 가락이요 국가적으로는 치세(治世)의 장단으로 병용되었음을 볼 때, 수전병행(修戰竝行)의 가치가 투영되어 있음이 나타난다.

아무튼 이러한 역사적․정신적 배경이 일제하 대종교 무장항쟁에 나타나는 군교일치(軍敎一致)․수전병행(修戰竝行)의 정신으로 연결되면서, 철학이 있는 싸움․정사(正邪)를 구별하는 싸움․살신성인하는 싸움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을 솔선수범한 대표적 인물들이 홍암 나철과 무원 김교헌(대종교名은 金獻)․백포 서일․단애 윤세복이다. 물론 이것은 대종교 정신으로 무장항일운동을 이끈 수많은 유무명(有無名) 독립지사들의 업적을 경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위의 네 사람이 대종교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들로서, 정신적 영향력을 가장 크게 끼친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하는 것이다.

먼저 나철은 대종교를 일으킨 인물로서, 대종교 무장항일운동의 정신적 동력을 제공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대종교 중광의 명분으로 내세운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國雖亡而道可存)”라는 시대적 명제는 무장항일운동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으며, 1915년 총본사를 백두산 기슭인 화룡현 청파호로 옮기므로 만주지역에서의 본격적인 무장항일운동의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특히 1916년 나철의 구월산 순교야말로 우리 민족혁명사상(民族革命史上) 최대결정(最大結晶) 으로써, 본격적인 무장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나철은 교통(敎統)을 넘겨준 무원 김헌에게 보낸 유서를 통해, 이 겨레를 위하여 죽으니 끝없는 영광이라 말하고 오직 힘써 세상을 복되게 하고 이 백성을 다행하게 만들라는 간곡한 부탁을 한다. 그리고 지금 조선 땅에는 나를 묻을 곳이 없으니 반드시 화장으로써 깨끗하게 해 달라는 유언과 함께, 유시(遺詩) <이세가(離世歌)>에서는 이신대명(以身代命)․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겠다는 죽음의 의지가 비장하다.

그러므로 나철의 순교를 통한 항일운동의 정신적 현시(顯示)를 말함에 있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정신과 육체를 다 바친 대종교도의 저항은 모두 나철의 밀유(密諭)에 의한 위대한 힘이었으며, 예관 신규식은 나철의 순교 당시 추도만장(追悼輓章)을 통해 “조선조 5백년 간 둘도 없는 선비요, 대종교 4천년 이후 제일의 종사다”라고 평을 했던 것이다.

특히 1916년 나철의 구월산 순교는 우리 민족혁명사상(民族革命史上) 최대 결정(結晶)으로써, 무장항일운동의 본격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나철의 순교를 육신제(肉身祭)로 표현하고 이로 인해 지리멸렬하던 민족전선이 비로소 통일된 정신적 지주 또 구심점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 이를 대변한다.

다음으로 무원 김헌(金獻: 初名 金敎獻)또한 무장항일운동에 정신적 영향력을 크게 떨쳤다. 그는 나철의 유언으로 대종교 중광 2세 교주를 맡는 인물로서, 특히 국운쇠망의 시기에 민족사의 지평을 새로이 열어 민족적 자긍심 고취를 통한 무장항일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한다.

그는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하면서 대종교적 신념으로 평생을 살기를 각오하고, 당시 그의 집에서 청소년 학도들을 방과 후에 모아놓고 민족사 교육을 실시하는 열정을 보인다.
그의 사학은 건국시조인 단군과 대종교를 연결시켜 그 연원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자 했으며, 이는 우리 민족사의 정통을 체계적으로 세워 종래의 사대주의사상을 불식하고 민족주의사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이러한 김헌의 역사인식은 후일 박은식․신채호뿐만이 아니라 류근․장도빈 등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최남선도 김헌에게 훈도(薰陶)를 받으며 그의 역사정신을 길러간 인물로서, 김헌이 만주로 망명할 당시 그가 소장하고 있던 방대한 양의 책들을 최남선에게 맡겨 보관케 하고 광문회(光文會)에서도 활용하게 했음도 그들의 긴밀한 관계를 뒷받침해 준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김헌의 역사서들은 단군을 비롯한 고유한 민족종교서임과 동시에 민족사를 체계화한 한국사이기도 했다. 또한 국권을 상실한 일제하에서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가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투쟁으로 인식해 볼 때, 역사교육을 통한 독립의식의 함양과 고취는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헌의 역사서는 재만한인사회의 학생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일반민중이나 상해임시정부의 학생교육서로 쓰였고 나아가 중광단․정의단․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들에게도 정신교육의 중요한 도구가 됨으로써 독립투쟁정신을 북돋는데 크게 공헌을 했다. 1923년 조선일보 사설에서는 <무원 김교헌 선생을 조(弔)함>이라는 제하(題下)에서 김헌을 대종교의 지도자임을 넘어 범민족적 지도자로 평가하며 애통하고 그의 바다와 같은 가르침은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과 사회에 깊이 각인되어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므로 백연(白淵) 김두봉은 김헌을 추도하는 자리를 통해 “이 어른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역사 공부와 발견에서 제일이며 오늘날 우리가 이만치라도 역사에 대한 생각을 가진 것은 모두 이 어른의 공적이니 그 공적이 큰 것은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 세운 공적보다 큰 것이다”라고 극찬을 했고, 북로군정서․신민부․한족연합회 등에서 주요간부로 독립군을 이끌었던 정신(鄭信)은 김헌을 추모하면서 “나는 이 어른을 종교가나 문학가로만 보지 않고 군사가(軍事家)로도 보는데 이는 우리가 북간도(北間島)에서 군사행동을 할 때에 이 어른이 미리 말한 것이 여러 차례 있는데 그 뒤에 모두 이 어른 말한 대로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김헌이 우리 민족사 정립에 끼친 영향력이 어느 정도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단지 역사의식의 고양을 통해 독립의식을 일깨운 정신적 역할로만 머문 것이 아닌 무장항일운동의 작전과 방향설정에도 간여했음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이러한 무장항일운동에 김헌이 직접 참여한 또 하나의 근거로는, 그가 주도하여 일궈낸 <대한독립선언서(일명:무오독립선언서)>에 반영된 내용을 보더라도 직감할 수 있다. 대종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한 이 선언서의 내용은 대종교적 정서를 반영한 무장혈전주의를 그대로 드러낸다.

먼저 이 선언은 대종교의 중광의 헌장인 <단군교포명서>에서 연유된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에 원(願)하고 맹세하는 내용이다.
또한 자주독립쟁취의 방법으로써 평화적 협상이나 외교적 노력이 아닌, 우리 독립군의 힘과 피로써 빼앗긴 조국을 되찾아야 함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선언서에 담긴 항일민족독립운동의 방략은 완전자주독립과 항일무장독립전에 있으며 이후 재만한인독립운동의 행동지침을 제시한 헌장이 됨은 물론, 재만항일독립운동단체인 중광단․정의단의 군정부(軍政府)․북로군정서․신민부 등으로 맥락을 이어가는 행동지침을 제시한 이념과 사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무장혈전주의의 정서는 지역을 뛰어넘어 대부분 대종교지도자들의 중심정서였음을 확인 할 수 있는데, <대동단결선언>과 <무오독립선언>에 모두 참여했고 상해를 중심으로 정치․외교적 항전을 수행했던 신규식 또한 그의 저술 ≪한국혼≫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하며 혈전주의를 고무하고 있다.

“치욕을 알게 되면 피로써 죽엄을 할 수 있고 , 치욕을 씻으려면 피로써 씻어야 할 것이다. 치욕을 잊어버린 자는 피가 식었음만이 아니라 피가 없는 것이다. 치욕을 아는 자의 피를 보지 못하거늘 어찌 치욕을 씻어버릴 수 있는 피가 있기를 바랄 것이냐! 오호! 동포들이여! 피가 있는 것인가? 또는 없는 것인가?”

한편 김헌은 교육활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물론 이것은 대종교의 교학일여(敎學一如) 정신의 실천으로써, 김헌뿐만이 아니라 서일이나 윤세복에게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으로 대종교 활동의 대표적 특징이었다.

서일이 1911년 중광단을 조직하여 무장항일투쟁의 전초기지를 만들었을 당시도 명동학교․동일학교․청일학교 등 10여 개의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던 것이나, 윤세복이 1911년 만주 환인현으로 이주하여 대종교 포교의 거점을 잡을 당시도 가장 먼저 동창학교를 설립을 시작으로 백산학교․대흥학교․대종학원 등 수많은 학교들을 설립․운영하였던 것도 모두 이러한 정신의 철저한 실천이었다.

또한 신흥강습소에서 발전된 서로군정서의 신흥무관학교나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 신민부의 배달학교 그리고 이 외의 무수한 소학교나 야간강습소 운영 등도 교학일여(敎學一如)의 철저한 구현이었던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주도한 이회영․이시영․이장녕․이동녕 역시 단군정신으로 무장한 투사들이었다. 안타깝게도 이회영의 대종교 입교 기록도 유실되었다. 그러나 이회영 또한 1910년대 후반에, 그의 동생 이시영과 더불어 대종교 서도본사(西一道本司:남만주 일대 관할)의 교인으로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흥무관학교의 교가에서 ‘우리 우리 배달나라’라는 표현이나, 신흥학우단가의 ‘배달 내 나라’라는 의식 역시 단군과 뗄 수 없는 의미였다. 당시 만주에는 한국인은 모두 단군자손이라는 민족의식이 강하게 퍼져있었고, 북간도와 서간도의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도 대종교의 역할이 지대했다.

이렇듯 대종교가 교육을 특히 중시하였던 것은, 전교건학(傳敎建學) 즉 교육을 통한 대종교의 포교가 곧 민족의식의 고양과 연결되고 나아가 독립사상고취를 통한 항일투쟁과 직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종교의 교당이 곧 학교인 동시에 독립운동기지로써, 이러한 삼위일체적인 정신적 배경이 항일투쟁의 발판이 되었고 나아가 군교일치(軍敎一致)로 무장된 투철한 정신집단을 만들 수 있었다.

대종교의 지도자 중 군교일치(軍敎一致)의 정신을 실천궁행한 인물이 서일이다. 그는 대종교를 신봉한지 짧은 기간에 종교적 깨달음을 얻는 인물로서, 5년도 안되어 대종교의 최고 교질(敎秩)인 사교(司敎)로 초승(超昇)되는 능력을 보인다.

그는 대종교 포교의 거점인 동도본사(東道本司)를 독립군기지 안에 설치함으로써 군교일치(軍敎一致)의 의지를 확고히 보여주고 진중(陣中)에서도 수도실을 따로 마련하여 원도(願禱)와 수행 그리고 대종교의 교리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음은 물론, 전투의 와중에서도 대종교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단주(檀珠)를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수전병행(修戰竝行)의 삶으로도 일관했다.

서일이 대종교의 중광을 의미하는 중광단 결성 당시부터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단 그리고 최후의 순교까지 보여준 이러한 정신의 배경에는 대종교 중광교조인 나철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서일은 당호(堂號)를 스스로 삼혜당(三兮堂)이라고 지었는데, 이것 또한 나철의 당호인 일지당(一之堂)의 뜻을 계승하여 완성하겠다는 의지였다. 즉 대종교의 교리 분삼합일 회삼귀일(分三合一 會三歸一)의 철학적 의미를 계산한 명명(命名)이었다.

이러한 서일의 정신적 배경은 중광단이나 정의부 그리고 북로군정서의 구성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북로군정서가 만들어낸 한국독립운동사의 금자탑인 청산리전쟁의 승리 또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독립군뿐만이 아니라, 북로군정서 관할 구역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종교 신자였던 까닭에 모연대(募捐隊)를 통한 군자금의 징수와 모금이 훨씬 수월했던 것도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총재였던 서일과 총사령관 김좌진을 위시한 중심인물 대부분이 대종교도였다는 점이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

까닭에 당시 21세의 나이로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전쟁에 참가했던 이범석은, 당시 만주 교포의 대다수가 대종교도였고 대종교의 확장은 독립운동의 확장이었으므로 청산리전쟁의 승리 또한 대종교라는 단군신앙의 힘과 민족정신에 불타는 신념의 결과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독립군들은 단군신앙에 뭉쳐서 파벌이나 사리잡념이 없이 광명정대했다고 말하면서, 독립군들은 10월 상달이 되면 돌로 제단을 쌓아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돼지와 소를 잡아 제천보본하고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빌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대종교 무장독립운동의 힘을 교학일여(敎學一如)를 통한 군교일치(軍敎一致)․수전병행(修戰竝行)의 가치로 이해한다면, 이범석의 위와 같은 증언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철기 이범석이 청산리전쟁을 앞두고 성스럽게 전사(戰死)하게 해 달라는 다짐을 읊은 <기전사가(祈戰死歌)>를 보면,
우리는 진정 종교적 신념을 통한 성전(聖戰)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숙연히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서일은 지(智)․용(勇)을 겸전(兼全)한 각인(覺人)으로서, 홍암의 영향 속에 성숙된 대종교 신앙을 통해 철저한 군교일치(軍敎一致)의 삶을 살다 간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수행과 싸움을 함께하는 수전병행(修戰竝行)의 모범을 보인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도 죽음의 철학을 관철시키려 했다. 시운을 통탄하며 나철 유언(遺言)의 한 구절을 읊조리며 유명을 달리한 그는, 죽을 때와 죽음의 의미 그리고 죽음의 힘을 진정 알았던 인물이었다. 그의 저서인 ≪회삼경(會三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철학이 이를 대변해준다.

“마땅히 복되지 않을 때 복되면 이것은 도리어 허물이요, 마땅히 살아야 하지 않을 때 오래 살면 이것은 도리어 욕됨이요, 마땅히 부귀하지 않을 때 부귀하면 이것은 도리어 부끄러움이다.”

한편 고루 이극로가 그의 삶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던 사람이 단애 윤세복이다. 윤세복 또한 1910년 12월 나철과의 3일 간의 시국대담 후에 크게 감명을 받고 대종교에 입교한다. 그리고 나철의 순교 소식을 감옥에서 접하고 홍암이 남긴 ‘사생부재구각신의유증신명(死生不在軀殼信義惟證神明: 죽고 사는 것은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니 신의는 오직 신명이 증명할 뿐이다)’이라는 유서를 눈물로 봉독(奉讀)하며 포교와 독립의 의지를 더욱 굳게 다져간다.

그는 입교(入敎)와 동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만주 포교의 책임을 지고 망명한 후, 대종교 포교를 통한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 또한 교학일여(敎學一如)의 정신을 통한 군교일치(軍敎一致)를 지향한 인물로서, 개인적으로는 철저한 수행을 통해 종교적 완성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한편 1924년 대종교 중광 3세 교주로 취임한 이후, 나철․김헌․서일 등 대종교 선열종사들의 심덕(心德)과 학덕(學德)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을 안고, 해방과 함께 감옥문을 나설 때까지 고독한 투쟁으로 일관했던 인물이 윤세복이다.

먼저 그가 없었다면 박은식과 신채호도 민족사학의 양대산맥으로 우뚝 설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 모두 윤세복의 초청으로 만주 환인현으로 건너가, 그 곳에 기거하면서, 대종교라는 민족사학의 배경을 윤세복으로부터 경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세복의 영향에 의한 백암과 단재의 민족사학의 업적이 후일 민족의식의 각성을 통한 항일독립투쟁의 정신적 동력이 되었음을 본다면, 이 방면에서도 항일운동에 기여한 그의 역할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윤세복의 교육기관 설립을 통한 대종교 포교와 항일운동도 대단했다. 그는 먼저 사재(私財)를 털어 동창학교를 세우고 교학일여(敎學一如)를 실천한 것을 시작으로, 백산학교의 설립․운영 등, 몽강현․무송현 ․안도현 등에 20여 개의 소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의 실시와 함께 대종교 포교에 진력하였으며 중국인들과의 친선도모에도 힘썼다. 특히 백산학교에서는 여름철 백두산 순례와 함께 사격연습도 했다는 기록을 볼 때, 대종교계통의 학교가 곧 독립군양성소라는 말이 실감되는 것이다.

대종교의 독립운동과 연관하여 윤세복의 업적으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로 인하여 그가 활동했던 대동청년단의 중심 인물들이 대종교에 입교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계기를 만든다는 점이다.
즉 안희제를 위시하여 김동삼․이극로․신성모․신백우․이시열․안호상․이원식․신채호․서상일․이경희․윤병호․차병철․김사용 등 많은 인물들이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한 인물들로서, 다양한 노선에서 대종교의 정신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서는 것이다.

까닭에 윤세복은 젊었을 때는 정치의 대가(大家)로 노년에는 종교의 대가(大家)로 이름을 많이 떨쳤으며, 그 당시 신규식이나 김동삼․신채호․박은식 같은 인물들에게도 많은 존경을 받았고 유일한 대정치가라는 평까지 들음은 물론 김좌진․정신․이장녕․김동평․성 호 등의 무장항일운동의 중진들도 윤세복의 정신지도를 많이 받았다.

윤세복은 그가 교주로 취임한 이듬해인 1926년, 신민부의 김좌진․박찬익 등 대종교의 중진들과 대종교의 활동을 좀더 조직적으로 강화하기 위하여 한국귀일당(韓國歸一黨)을 조직한다. 귀일(歸一)의 의미는 대종교 교리 삼일철학(三一哲學)의 핵심이 되는 삼진귀일(三眞歸一)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념․사상․정파를 초월하여 단군한배검(한배․檀帝)을 모시는 일민(一民)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써, 그 본부를 영고탑에 두고 1천여 명이 넘게 활동을 했다.

이것은 투철한 대종교 정신으로의 무장을 통한 조직적인 항일활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종교의 교세가 암암리에 커져가자 일제는 급기야 삼시협정(三矢協定)을 구실로 1926년 말 길림독군겸성장(吉林督軍兼省長) 장작상의 명의로 대종교포교금지령을 내린다. 대종교 교세의 확장은 곧 독립운동 세력의 확산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윤세복은 1927년 총본사를 밀산 당벽진으로 옮기고 대종교의 조직정비를 통해 재도약을 준비한다. 그것은 밀산이 서일이 순교한 곳이며, 현천묵이 서일의 뜻을 계승하여 대한군정서를 재정비한 곳이기도 했고 김좌진이 재기를 꿈꾸며 신민부의 혼(魂)을 길렀던 곳임을 상기할 때, 한마디로 밀산은 대종교의 한(恨)과 꿈이 서린 대종교와 항일운동의 성지(聖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찬익․이동녕․이시영․윤복영․조성환 등 대종교의 중진들의 적극적이고 꾸준한 외교교섭을 통해 1931년에 금지령은 풀렸다.

윤세복은 6년 동안의 침묵을 털고 합법적 절차를 거쳐 포교선도사업을 새롭게 시작한다. 하얼빈에 대종교선도회 설치를 시작으로 총본사를 동경성으로 이전함은 물론, 안희제․강철구의 노력으로 활발한 교적간행사업(敎迹刊行事業)과 대종학원 설립을 통한 교육사업도 재개한다.

그러나 일제는 공공연한 간섭과 함께 대종교의 상황을 치밀하게 정탐하는 등 기회를 노리다가 1942년 11월 19일, 국내에서는 조선어학회사건과 때를 같이하여 윤세복 교주를 위시한 21명의 대종교지도자들을 동시에 검색(檢索)했다. 이 사건이 일제하 최대 종교박해인 임오교변이다. 또한 공교롭게도 이 날은 대종교 중광 2세 교주 김헌의 19회 기신일(忌辰日)이었다. 검거 당시 윤세복이 일경(日警)에게 던진 다음과 같은 말이 주목된다.

“내가 關東軍의 諒解를 얻을 때부터 너희에게 속아서 近十年을 지냈거니와 오늘부터는 너희들이 나에게 속는 것이다.”

윤세복의 이 말 속에는 속은 것에 대한 후회 이전에, 일제의 간계와 박해를 예견하고 받아들이는 종교지도자로서의 의연함과 더불어 독립운동지도자로서의 불굴의 의지가 엿보인다.

또한 윤세복은 감중자술(坎中自述) 4장에서 임오교변에 연루되어 투옥된 동지들이, 윤세복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이라고 괴로워하면서도, 대종교를 떠받드는 정성으로 어떠한 고형(拷刑)이 있어도 서로 원망하지 말자는 심회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옥중생활 속의 온갖 고문(拷問) 속에서도 오히려 대종교의 ≪삼일신고(三一神誥)≫<진리훈>에 나오는 반망즉진(返妄卽眞: 인간완성의 길)의 방법을 체계화하여 ≪삼법회통(三法會通)≫이라는 수행서를 완성하는 종교적 열정을 쉬지 않았다.

한 마디로 윤세복은 자신의 모든 것을 대종교와 독립운동을 위해 바쳤다. 나철로부터 감명을 받고 대종교에 입교한 후, 대종교 교당과 학교와 독립운동근거지를 일치시킨 교학일여(敎學一如) 군교일치(軍敎一致)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는가 하면 수많은 독립지사들에게 미친 정신적 감화는 대종교 무장항일운동의 중요한 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당호(堂號)인 허당(虛堂)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신의 업적이나 영달의 기록을 일체 남기지를 않았다. 오직 하나 마지막까지 풍요롭게 품었던 것은 나철의 가르침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이다. 이 경구의 실천이 그의 살신성인의 삶에 지표가 되었으며, 이러한 삶의 지표가 그를 통해 무장항일운동에 일파만파의 행동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2) 문화투쟁 배경으로서의 단군

문화의 철학적 의미는 진리를 추구하고 끊임없이 진보․향상하려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 또는 그에 따른 정신적․물질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민족문화란 한 민족의 감정․언어․풍습․생활환경 등을 터전으로 하여 그 민족의 특성을 나타낸 문화를 일컫는다.

이렇게 볼 때 일제가 우리 민족을 붕괴시키고 영구식민지를 도모하기 위해 역사왜곡과 언어말살, 그리고 민족공동체의식을 고양하는 제반의 문화행사를 없애려 했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일제하 대종교의 문화투쟁은 이러한 획책에 맞서 우리의 민족문화를 온전히 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나아가 민족주권을 되찾으려 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먼저 대종교의 중광과 함께 민족의 경절로 등장하는 개천절은, 민족공동체의식의 부활을 통해 민족적 대동단결을 고무시켰다는데 문화사적 의미가 크다. 본디 개천절은 상고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영고(迎鼓)․동맹(東盟)․무천(舞天) 그리고 시월상달제 등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구한말 대종교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단군교포명서>에 10월 3일을 ‘단군개극입도지경절(檀君開極立道之慶節)’이라고 기록된 것을 계승하여 부활된 명절이다.

그러므로 일제하에서의 개천절은 종교적 기념일을 넘어서 범민족적 기념일로 인식되었으며, 망명동포들이 거주하는 곳에서도 때마다 기념행사를 거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의 의지를 다졌던 것이다.

안재홍은 단군이야말로 우리 스스로의 민족, 스스로의 나라, 스스로의 문화적 틀을 제공해준 근원이라 말하면서, 개천절을 국경일로 기념하는 것은 조국의 자유와 민족이 독립자주하는 정신을 기리는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또한 조소앙은 우리 민족이 단군의 개천건국 이래 동방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졌다고 자부하면서 독립자주의 명분과 문화적 영도력의 능력을 단군의 개천(開天)에서 찾았으며,
위당 정인보도 개천의 의미를 단군이 하늘의 부탁을 받아 홍익인간의 뜻을 이 땅에 새긴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천민의식(天民意識)으로서의 자부심과 문화민족으로의 유구함을 강조하여 민족적 단결을 일깨웠다.

또한 <단군교포명서>에서는 우리 고유 한복에 나타나는 흰색의 영금(領襟:동정)과 단임(檀任:댄님), 어린 아이의 변발(辮髮) 치장시의 단계(檀戒:댕기), 그리고 집안 성조신(成造神)에 대한 고사(告祀)와 단군어진(檀君御眞)에 대한 유래, 또한 팽우씨(彭虞氏)와 관련된 선령당(仙靈堂; 성황당, 서낭당 - 필자 註)과 고시씨(高矢氏)를 기리기 위해 유래된 ‘고시레’ 등등의 문화적 배경을 설명한다.
이것은 그 동안 불교나 유교문화 속에 소외되고 외면된 민간기층문화(民間基層文化)에 문화적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복원이라는 문화사적 의미와 함께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와해시키려 했던 일제에 대해 문화적 저항요소로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한편 민족문화를 지탱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지적되는 것이 언어와 역사다. 민족 집단에 있어 언어와 역사는 그 집단의 철학․사상과 더불어 정체성을 지탱하는 핵심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일제하 이 두 분야에 대해 보여준 대종교의 애착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먼저 한글 등장 이후 조선조 말기까지 한글은 한마디로 국어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의 사회구조와 밀접하다. 즉 당시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조선의 국시(國是)인 유교적 정서를 토대로 한문으로 소양을 쌓고 그것을 통하여 과거에 응시하고 사회적 입지를 굳건히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 있어 한문이라는 것은 학문이나 정치․사회 활동 및 여가활동 등 모든 지적표현활동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지적(知的) 구조에다가 중국에 대한 사대모화사상이 맞물려 한문숭상주의가 당연히 득세할 수 있었고 한글은 그러한 구조적 벽에 걸려 언문(諺文: 상놈의 글)으로 폄하되어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다.

까닭에 우리 글의 의미를 민족문화의 반열 위에 찬란하게 내세운다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틀과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먼저 정신적으로는 유교적 사대모화사상(事大慕華思想)으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이며, 한편으로는 기득권을 가진 지식층의 한문어(漢文語)를 청산하고 민중보편적인 우리글의 확립을 조직적으로 도모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의 선각자가 바로 한힌샘 주시경이다. 물론 1905년 신정국문(新訂國文) 실시 주장했던 지석영도 대종교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기록이다. 그러나 주시경이야말로 우리글의 명칭을 ‘한글’이라고 처음 명명한 사람으로서, 한글을 통한 언어 민족주의와 한글 대중화를 위해 1914년 7월 27일 임종하기까지 오로지 헌신했던 인물이다.

그의 한글사랑에 대한 계기 또한 대종교다. 주시경은 배재학당 졸업 당시에 받은 예수교 세례를 과감히 버리고 대종교로 개종한다. 그는 무력침략보다 정신적 침략을 더 무서운 것으로 여겼으며 본인이 예수교인으로 있다는 것은 이미 정신적 침략을 받은 것으로 다음과 같이 단정했다.

“선생은 종교가 예수교였는데, 이 때 탑골승방에서 돌아오다가 전덕기 목사를 보고, ‘무력침략과 종교적 정신침략은 어느 것이 더 무섭겠습니까?’하고 물을 때에 전목사는 ‘정신침략이 더 무섭지.’하매, 선생은 ‘그러면 선생이나 나는 벌써 정신침략을 당한 사람이니, 그냥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하였다. 전목사는 ‘종교의 진리만 받아들일 것이지 정책을 받지 않으면 될 것이오.’하였지마는, 선생은 과거 사대사상이 종교침략의 결과임을 말하고, 종래의 國敎인 대종교(곧 단군교)로 개종하여, 동지를 모으려고 최린, 기타 여러 종교인들과 운동을 일으키었으므로, 종교인들에게 비난과 욕을 사게 되었다.”

또한 우리 민족 과거의 사대사상이 종교침략의 결과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종래의 국교(國敎)인 대종교로 개종한다고 천명한 것을 보더라도, 주시경의 한글운동의 배경에는 철저한 대종교적 정서를 토대로 한 언어민족주의적 가치가 지탱하고 있었다.

주시경의 이러한 국어정신을 계승한 대표적 인물이 김두봉이다. 김두봉은 주시경의 수제자이면서 대종교를 중광한 나철의 수제자였으며 대종교의 교리․교사에 해박한 인물이었다. 그는 1914년 주시경이 세상을 떠나자 스승이 못다 한 일을 이어 받아 그것을 더 넓히고 더 열어서 우리의 말과 글과 얼이 묻히지 않고 영원히 자랄 수 있는 기틀을 다지기 위해 ≪조선말본≫을 저술한 인물이다.

당시 ≪조선말본≫은 그 때까지 발표된 문법학설로는 가장 깊고 넓게 연구된 대표적 권위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그는 1916년 나철의 구월산 봉심(奉審)에 수석시자(首席侍者)로 동행을 한다.
당시 나철은 6명의 시봉자(侍奉者)를 대동하는데 그 중에서 김두봉은 교질(敎秩)이 가장 높은 상교(尙敎)의 위치에 있었다. 상교의 교질이란 대종교에 봉교한 지 최소 5년 이상이 지나야 얻을 수 있는 교인의 지위로서, 신행(信行)이 일치하고 교리(敎理)의 연찬(硏鑽)이 월등하며 교문(敎門)의 오대종지(五大宗旨)와 오대의무(五大義務)를 잘 이행하며 교우(交友)들에 모범이 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교질이다.

후일 ‘조선어학회’ 조직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김두봉이 일찍부터 대종교에 입교하여 활동했음은 물론 대종교에서의 그 역할 또한 중요했음을 짐작해 볼 때 그의 한글사랑 배경에도 이러한 정신 굳게 자리잡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이극로 또한 그의 혁혁한 문화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분단의 상황 속에서 김두봉과 같이 우리 민족운동사에 잊혀진 인물 중의 하나로 기억된다. 이극로는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고 파리대학과 런던대학에서 음성학을 연구한 뒤 귀국하여 1929년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한다.

한힌샘 주시경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1921년에 결성한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명칭을 바꾸고 조선어사전편찬․한글맞춤법제정․외래어표기․표준어사정 등의 굵직한 국어의 당면문제들을 추진해 나가는데, 이극로는 간사장(幹事長)으로서 사실상 어학회를 이끌었다.

이극로 또한 대종교를 통하여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국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며 국어연구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극로의 대종교 입교 시기는 1912년으로 추측되는데, 이러한 추측은 그가 1912년 만주 회인현(懷仁縣)에서 대종교를 처음 접하고 대종교의 중심인물이었던 단애 윤세복과 백암 박은식, 그리고 국어연구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백주(白舟) 김진[金振: 대종교에서는 金永肅으로 많이 알려짐(필자 주)]을 만나 이곳에서 생활하게 된다.

1914년 이극로는 회인현(환인현) 대종교 교당에서 신채호도 처음 만나 영향을 받은 듯 하며, 윤세복을 따라 백두삼림 무송현(撫松縣)으로 들어가서는 대종교 계열의 학교인 백산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이러한 만남들은 이극로의 인생에 중요한 변화를 몰고 온다. 당시 윤세복과 박은식, 그리고 신채호의 만남과 한글연구의 계기가 되는 김영숙과의 만남은 그가 대종교적 민족주의정서를 토대로 한글운동에 헌신하게 된 중요한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윤세복은 대종교의 절친한 동지인 백산 안희제와 함께, 이극로뿐만이 아니라 신성모․안호상 등을 중국 상해로 보내 구라파 유학을 주선한다. 특히 이극로로 하여금 베를린대학에 조선어과(朝鮮語科)를 설치해 전세계에 우리 국어․국문 그리고 우리 문화를 최초로 선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대종교정신을 통한 국어사랑에 초지일관할 수 있는 의지를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윤세복의 영향은 지대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극로는 해방 후에도, 당시 대종교의 교주를 맡고 있던 윤세복을 도와, 전강(典講)이라는 중책 맡아 대종교의 연구․교육 활동에 중심이 되었으며 종학연구회(倧學硏究會)회원으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임오교변(1942년 대종교지도자 일제구속사건)과 조선어학회사건이 모두 이극로와 연관이 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임오교변이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널리펴는 말」
이라는 글이 단서가 된 것 같이, 조선어학회사건은 만주에서 윤세복이 「단군성가(檀君聖歌)」라는 가사를 지어 경성에 있는 이극로에게 보내 작곡을 의뢰했는데, 이 가사가 조선어학회 이극로의 책상 위에서 일경(日警)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조선어학회사건의 결정적인 빌미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이극로도 대종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그의 국어사랑의 실천 및 조선어학회를 이끌었음을 볼 때, 그의 국어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의 정신적 배경 또한 대종교로 귀착됨이 분명해진다.

이 밖에도 조선어학회와 연관된 많은 인물들이 대종교 즉 단군이데올로기를 토대로 활동하면서 일제에 대해 조직적인 저항을 감행했다. 이것은 조선어학회가 대종교정신으로 무장한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태동시킨 단체라는 점과 조선어학회를 이끌었던 김두봉과 이극로의 대종교와의 밀접한 관계를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한 대표적 인물들 중, 최현배․정인보․안호상․안재홍․이병기 등도 대종교 내의 그 기록의 인멸에도 불구하고 대종교정신과 관련하여 활동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최현배는 이극로를 도와 대종교정신을 토대로 한글연구와 함께 조선어학회를 활성화시킨 인물로서, 우리 민족적 이상을 단군신화에 있음을 강조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만이 가진 이상이라고 내세웠다.
나아가 최현배는 인류구제의 대이상을 품고 이 세상에 내려온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고, 예술을 좋아하며, 지상유일신인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천명하면서 지금의 대종교는 바로 그러한 민족적 신앙의 갱생(更生)이라고 밝혔다.

최현배의 한글운동의 배경에도 대종교와 더불어, 주시경․김두봉 등이 있었다. 최현배는 주시경․김두봉과 같은 민족주의자들의 감화를 받고 1911년 대종교에 입교했다.
다음의 기록에서도 이것이 확인된다.

“이 때(경성고보 2학년 때인 1911년-인용자주) 선생님은 학교에 열심히 다니시는 외에 다른 학생이 안 하는 두 가지 일을 하셨으니, 하나는 주시경 선생님의 한글강습원에 나가셔서 우리말 공부에 열중하시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나철(羅喆) 대종사를 따라 그가 주관하는 대종교에 다니며, 단군 한배의 가르침과 은덕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최현배의 나라사랑의 정신과 우리말과 글에 대한 애착, 그리고 우리 민족의 이상 실현을 위한 포부가 이 당시에 형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더욱이 최현배는 대종교에 대한 믿음을 주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굳게 견지하려 했음을, 다음의 기록이 알려주고 있다.

“선생님(최현배-인용자주)이 이 학교(경성고보-인용자주) 3학년 때(1912년-인용자주)의 일입니다. 하루는 담임선생인 다카하시(高橋享)가 선생님을 불러 앞에 세우고, ‘대종교에 다니는 것은 부당하니, 그만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뒤에도 몰래 계속하여 다니시며, ≪신단실기(神檀實記)≫․≪삼일신고(三一神誥)≫ 등, 문헌을 손수 베껴서 읽으셨습니다.“

이것은 최현배가 경성고보 3학년 때, 일본인 교사에 의해 대종교를 나가지 말라는 경고까지 받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최현배는 대종교의 핵심 교사(敎史)이자 민족사서인 ≪신단실기≫와 핵심 교리인 ≪삼일신고≫를 꾸준히 공부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최현배의 사상적 배경에 대종교의 영향이 컸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두 서책이야말로 대종교 교리․교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종교에 대한 최현배의 위와 같은 배경을 살펴볼 때, 최현배의 한글사랑․나라사랑, 그리고 그것을 통해 보여준 일제에 대한 문화투쟁의 배경에는 역시 대종교라는 정신적 가치가 굳게 자리 잡은 것이다.
정인보 또한 대종교의 정신으로 애국적 삶을 일관한 인물로서, 그는 나철의 유훈(遺訓)을 받고 이세정․맹주천․신명균․엄주천 등 30여명과 함께 대종교 국내비밀사원(國內秘密社員)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안호상은 백산 안희제가 주관하던 기미육영회의 장학금으로 독일유학을 한 인물로서 당시 대종교 국내비밀연락원 역할을 했으며 기미운동시(己未運動時)에는 대종교 북만귀일당원(北滿歸一黨員)으로도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대종교의 철학을 연구하여 보급하는데 심혈을 기울임은 물론, 1990년대에는 대종교총전교로서 대종교의 총책임을 맡기도 했다.

안재홍 역시 대종교의 정신 위에서 나라사랑의 길을 걸어간 인물이다. 그의 미망인(未亡人) 김부례 여사(女史)의 생전 회고에 의하면, 남편은 대종교를 믿는데 매일 아침 기도를 하며 통일에 대해 염원을 하고, 그 날 하루 동안 내 마음 변하지 않게 기원했다고 한다.
한글운동에도 남다른 애착을 보였던 그는 후일 ‘한글날’을 ‘개천절’과 더불어 중시함에 있어, 그 의미 부여를 “國家的 意味에서 開天節이요 民族文化的 意味에서 ‘한글날’이니, 한글날은 國慶節 아닌 國慶節이다.” 라고 중시하고 있다.

가람 이병기는 우리나라 현대시조의 개척자 혹은 아버지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시조 증흥을 통하여 우리의 국문학을 살찌우게 한 인물이다. 그는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직접 배웠으며, 특히 창씨개명의 거부와 일체의 친일적 내용이 담긴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은 대쪽같은 애국자이기도 했다.

이병기의 이러한 정신적 배경 또한 대종교와 무관치 않은데 그가 남긴 일기를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가 대종교에 정식으로 입교한 것은 1920년 11월 21일로 나타난다. 그는 대종교 신앙이야말로 오랜 세월 전부터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흘러왔음을 밝히고 후손들의 믿음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또한 삼신의 의미가 바로 한배님임을 말하면서 우리 민족 구성원이면 누구에게나 이미 녹아있는 종교적 성정(性情)임을 피력함과 아울러, 새삼스레 대종교에 입교하여 믿는다는 것이 형식적 번거로움임을 토로한다. 즉 이병기는 대종교를 국교(國敎)의 가치로 인식했던 인물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일제하 한글연구와 조선어학회활동, 그리고 그것을 통한 항일운동의 배경에는 대종교 신앙이라는 정신적 가치가 굳게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그 외의 문학적인 부분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각성이, 대종교적 정서 위에서 민족문학적 모티브를 찾으려 했던 안확(安廓)
을 위시하여, 지성인들의 양심과 어울려 나타난다.

빙허 현진건이 1932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단군성적순례>또한 이러한 정서의 연장에서 출현한 것이다. 현진건이 <단군성적순례>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은 나철 시 한 수로 끝맺고 있음도 이에 대한 반증이다.

“參星壇上拜吾天 참성단에 올라 하늘에 절하니天祖神靈赫赫然 한배님의 영험이 밝기도 밝아라 廣開南北東西至 누리를 개척함이 가없이 이르고 歷溯四千三百年 느리워진 역사 사천삼백 년이라倍達族光從古闡 배달족의 영광 본받아 떨치니大倧道脈至今傳 대종교의 가르침 지금도 전하네.”

대종교의 등장은 한국사학사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그것은 대종교의 교리(敎理)나 교사(敎史)의 특성상, 정신사관적(精神史觀的)인 요소의 강조와 대륙사관적(大陸史觀的)인 측면의 부각, 그리고 문화사관적(文化史觀的)인 방향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사관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나라 사학사의 흐름을 유교사학․불교사학 그리고 도가사학(道家史學)의 흐름으로 이해해 볼 때, 과거 유교와 불교중심으로 흘러 내려오는 역사인식을 도가(道家) 또는 신교(神敎), 즉 대종교적 역사인식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대륙사관적인 방향에서 살펴볼 때, 그 동안 반도중심적, 즉 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인식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요․금․청 등의 대륙중심의 인식으로 확산시켜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사관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외래사조에 침체되고 와해된 우리 고유문화, 즉 신교문화(神敎文化)를 복원하고 그것에 정체성(正體性)을 부여하는 작업과도 일치하는 작업이었다.
한편 이러한 요소들의 강조는 당연히 민족적 성향을 강하게 나타내며 타율성(他律性)․정체성(停滯性)․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위장된 일제 식민지학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사학으로 자리잡았고 나아가 민족적 역사의식의 고취를 통해 항일운동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정신사관적 측면을 분석함에 있어 가장 선행해야 할 부분이 대종교 중광의 종교적 특성을 살펴보는 일이다. 한말 등장하는 여타 종교의 교주들과는 달리, 나철은 자기역할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즉 동학의 최수운이 천주(天主)의 사도(使徒)로 나타나는 것과 증산교의 강일순이 스스로 천제(天帝)요 옥황상제(玉皇上帝)로 등장하는데 비해, 나 철은 우리 민족 본래의 하느님 신앙의 창교주(創敎主)인 단군의 종교에 입교하여 일개 교인의 위치로 대종교를 중광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대종교가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민족사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당위성을 얻게 되는 이유다. 즉 대종교에서 단군의 의미는 종교적 입장으로 본다면 창교주인 동시에 민족사의 관점에서는 국조(國祖)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종교에서 단군의 위상을 올바로 세운다는 의미는 종교사와 국사를 동시에 바로 세운다는 뜻과도 일맥하는 것으로 신교사관(神敎史觀) 곧 대종교사관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위와 같은 대종교사관을 가장 잘 정리한 인물이 김교헌이다. 김교헌은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한 인물로서, 후일 대종교 중광 2세 교주를 역임한다. 특히 그는 1910년 광문회(光文會) 활동을 이끌면서 고전(古典)과 사서(史書)의 수집․간행 및 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최남선․장지연․류근․신채호 등도 이 당시 김교헌의 영향을 받으며 민족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갔다. 광문회에서는 김교헌의 가문에 역대로 수집․소장되어 오던 방대한 양의 서책과 문헌이 중요하게 활용되었고 후일 그 책들은 최남선이 보관하다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었다.
김교헌은 그의 저술인 ≪신단민사(神壇民史)≫․≪신단실기(神壇實記)≫․≪배달족역사≫에서 대종교의 역사적 원형인 신교사관(神敎史觀)을 정립한다.

≪신단민사≫에서는 우리 단군민족의 혈통의 흐름을 대종교의 경전인 ≪신사기(神事記)≫와 같은 구족설(九族說)에 그 근원을 찾음과 함께, 역사적 강역인식에서는 대륙을 주요 활동무대로 설정하여 고조선부터 조선조까지 철저하게 대륙적 인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까닭에 고려와 조선시대도 여요시대(麗遼時代)․여금시대(麗金時代)․조청시대(朝淸時代)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교문화에 대해 단군의 오훈(五訓)을 시작으로 역대국가들의 제천행사를 밝힘과 함께 구서(九誓)․오계(五戒)․팔관(八關)의 의미를 구명한은 물론, 대종교의 역대 교명(敎名)을 설명함으로써 민족문화의 고유성과 공유성(公有性)․전통성․자주성을 강조한다. ≪신단실기≫에서도 단군에 대한 사적(事蹟)과 신교사상에 대한 자취를 모아 자료집의 성격으로 정리해 놓았으며 ≪배달족역사≫는, 정확히 말하면 김교헌이 교열(校閱)한 것을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가 발간한 것으로, ≪신단민사≫의 굵은 줄기만을 간추려 놓은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먼저 신채호 역사정신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낭가사상(郎家思想)의 형성 배경에도 대종교의 정신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단적인 예로, 신채호가 대종교를 경험하기 이전에는 그가 유교라는 정신적 바탕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신교(神敎)와 같은 맥락인 한국 고대선교(古代仙敎)에 대해서, 불로장수를 추구하는 중국종교의 아류(亞流)로 공박했다.

그러던 그가 단군신앙 등장 이후 대종교를 경험하면서부터, 중국도교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우리 민족 고유의 선교가 이미 도교 수입 이전부터 형성되어 우리 민족신앙의 중요한 줄기가 되었다고 인식함으로써, 의식의 중대한 변화를 몰고 온다.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신채호의 논문이 1910년 3월에 발표된 <동국고대선교고(東國古代仙敎考)>인데, 그는 이 글에서 과거의 유교정신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 고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역사의식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1910년대 이후의 신채호의 역사연구는 거의 대부분을 선교의 실체를 연구하는 데 두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러한 사상적 바탕 위에서 대륙적 인식 및 문화사의 지평을 넓혀 간 것이다.

박은식 또한 대종교를 경험하기 이전에는 유교적 중화사관(中華史觀)에서 헤어나지 못한 고루한 유학자에 지나지 않았다.
1910년 이전의 박은식은 인생이나 사회구제의 대명제(大命題)로 공부자(孔夫子)의 도, 즉 유교밖에 없다는 인식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유교구신(儒敎救新)을 위하여 양명학 운동이나 대동교(大同敎) 창건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까닭에 대종교 경험 이전의 박은식의 역사의식은 민족사관과는 거리가 먼 유교적 애국사상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1910년 만주로 망명한 후의 박은식의 변화는 환골탈태 그 자체였다. 바로 대종교를 경험하면서다. 그의 역사정신의 고갱이라 할 수 있는 국혼(國魂)의 의미도 바로 대종교의 정신적 구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신교(神敎)의 현대적 구현이 대종교로 단정하고 대종교를 국교(國敎)로서의 가치가 있음을 고증도 한다.

박은식 역사인식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이 <몽배금태조>다. 이 글은 나라가 망한데 대한 준엄한 자기비판이 통곡처럼 흐르고 앞으로 나라를 찾으려는 결의가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통렬한 독립지침서이며 변모된 박은식에 대한 사상과 의식이 가장 집중적으로 표된 책으로써,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대종교의 영향임을 서두에서 박은식 스스로 밝히고 있다.

박은식은 이 글을 통하여 유교적 가치에 대한 환멸과 함께, 유교를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위해 반드시 청산해야 할 반민족적 가치로 규정함은 물론, 망명 전 교육의 정신적 토대였던 유교가 교육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박은식은, 육체의 생활은 잠시일 뿐 영혼의 존재는 영구한 것이라고 언급하며, 인간이 나라에 충성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자면 육신의 고초는 잠시일 뿐이요 그 영혼의 쾌락은 무궁한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에 화를 주는 자는 육체의 쾌락은 잠시일 뿐이요 영혼의 고초는 무궁할 것이라고 경고함으로써, 정신사관의 본질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박은식의 역사정신이 ≪대동고대사론≫․≪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흐르는 국혼사관(國魂史觀)․대륙사관․신교문화사관(神敎文化史觀)의 형성에 중요한 배경이 되는 것이다.

한편 정인보의 역사정신의 중추인 ‘조선얼’ 또한 대종교의 영향 속에서 배태된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정인보는 홍암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국내비밀활동을 전개했을 뿐만이 아니라, 신규식의 동제사(同濟社) 활동에도 가담하여 직․간접적인 대종교 활동을 감행한다. 그 또한 대종교가 단군이 처음 교화를 베푼 것이며 대종교를 국교로 인식했던 인물이다.

특히 정인보는 인간이 ‘얼’을 잃어버린 것은 남이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자실(自失)하는 것임을 환기시키면서, 학문이 얼이 아니면 헛것이고 예교(禮敎)도 얼이 아니면 빈 탈이며, 문장(文章)이 얼이 아니면 달(達)할 것이 없고 역사정신 또한 ‘얼’이 아니면 박힐 것이 없음을 강조하면서, 얼은 진(眞)과 실(實)이니 얼이 아니면 가(假)와 허(虛)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던 인물이다.

이 밖에도 안재홍․이상룡․류근․장도빈 등도 대종교적 정서 위에서 그 나름의 민족사를 개척하고 서술한 것인데, 이들 모두 다음과 같은 박은식 역사인식의 정서에 부합되는 인물들이었다.

“魂의 됨됨은 魄에 따라 죽고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國敎와 國史가 망하지 아니하면 그 나라도 망하지 않는다. 한국의 魄은 이미 죽었으나 이른바 魂이란 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죽은 것인가.(而魂之爲物不隨魄而生死故曰國敎國史不忘則其國不亡也嗚呼韓國魄已死矣所謂魂者存乎不乎)”

(3) 정치사상투쟁 배경으로서의 단군

대종교는 본디 정치적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대종교의 창교주인 단군 때부터 교정일치(敎政一致)의 전통이 흘러 왔으며, 대종교의 전래적 문화 또한 정치적 성격과 부합되는 면이 많다는 점이다. 가령 개천절의 역사적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상고제천에서부터 영고․동맹․무천 등등의 행사 자체가 국가주도의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구서(九誓)나 팔관(八關) 또는 오계(五戒) 등의 주요내용이 국가집단의 유지․안정․발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또한 대종교의 중광과 더불어, 정치․사회적 이념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홍익인간의 가치가 대종교의 교의(敎義)이자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이라는 일치감을 갖는다. 더욱이 헌법상으로나 국가적 정체상(政體上)으로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홍익인간이야말로 이념․사상을 초월한 우리 민족의 정서적 국시(國是)라는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일제 하 혹은 해방 후에 대종교를 신앙으로 접하기보다는 국조숭배의 의미로 대했던 많은 지도층 인사들의 인식의 기초도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제 하 만주지역을 보더라도, 대종교는 종교적 성격보다 이주 한인사회를 상징하는 사회운동단체와 같아서 다른 종교인들과도 쉽게 교류하게 되었다. 천도교․기독교인이라 하여도 대종교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으며, 모두 백두산 아래 모인 배달족인 뿐이었다.

또한 대종교에 입교하여 대종교인으로서 활동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국교적 대종교관을 가진 인물들도 많았다고 본다. 백범 김구는 카톨릭 배태교인(胚胎敎人)이면서도 대종교를 방문할 때마다 천진전(天眞殿)에 참배(參拜)드리고 윤세복을 배견(拜見)한 후 나도 대종교인이라는 것을 자처하면서, 우리가 한배검 자손인 이상 모두 그 가르침 속에 살아 왔음을 고백하곤 했다.

백범의 이러한 인식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글이 ≪백범일지≫다. 그는 이 글 <나의 소원>부분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에 우뚝 서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하는데, 무력(武力)이나 경제력(經濟力)이 아닌 ‘아름다운 문화’로써 우뚝 서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그 힘의 원천이 우리 국조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이 그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승만 또한 일찍부터 서구적 분위기에서 기독교적 정서에 친숙한 인물이지만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 당시 어천절기념식 석상에서 행한 찬송사(讚頌詞)
를 통해 단군황조의 뜻을 계승하고 펴겠다는 간곡한 다짐이 주목되는데, 1921년 초 상해 신원(申園)공원에서 이승만은 대종교의 핵심 인물이었던 신규식․박찬익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을 볼 때 이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안창호와 이동휘도 개천절송축사와 개천절축사를 통하여 단군설교(檀君設敎)의 민족적 의미를 예찬했는데, 당시의 단군이나 대종교는 종교나 이념을 초월한 민족단합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기독교 계열의 학교였던 만주 명동학교의 실례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당시 김약연이 이끌던 명동학교에서는 교실에 단군초상화를 걸고 수업을 했는가 하면, 예배당에도 십자가와 단군기를 함께 놓고 예배를 드렸다 한다. 또한 명동학교 교가의 가사에는 백두산과 더불어 대종교의 용어인 단군한배검 얘기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결혼할 때에도 단군의 아들․딸들이 했으니 아들을 낳으라는 의미로 검정 두루마기를 입었다는 증언이 이를 확인해 준다.
김약연이 대종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에 기꺼이 참여한 이유가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정치사상투쟁의 정신적 배경에 있어 대종교의 영향관계는 역시 상해임시정부의 준비 및 성립과정과 그 이론체계수립단계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활동한 수많은 대종교계 인물들이 있으나 여기서는 신규식과 조소앙의 활동을 중심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이 방면에서 가장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 신규식이다. 신규식은 목숨의 은인인 나철과 인연이 되어 대종교 중광과 함께 가장 먼저 입교하여 죽을 때까지 대종교를 독신하는 인물이다. 1910년 스스로 해외시교(海外施敎)를 자임하여 상해로 떠나는데, 당시 중국관내의 한국인 대부분이 동삼성일대(東三省一帶)에 모여 활동했으므로 상해일대에서 한국인 활동은 전무한 상태였다.

망국의 한을 품고 망명한 그는 먼저 나라가 망한 중요한 원인을 단군 종교와 민족사를 망각한데 있다고 신랄한 탄식을 하고 있다.
그리고 노예로 전락한 현실 속에서도 자주성을 잃어버린 채, 우리의 단군문명(檀君文明)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지식인들을 다음의 비아냥으로 비판하면서, 우리의 것이 모두 무너져 가는 것에 대해 심각한 걱정을 토로한다.

그리고 신규식은 이러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길로 단연 대종교 부흥을 내 세우고 있다. 엄격히 말하면 그는 혁명가이며 종교가였다. 조국을 광복하는 일을 하나의 공작(工作)이나 포부로만 생각지 않고 일종의 종교요 신앙으로 보았던 것이다. 까닭에 그는 한민족이 부흥하려면 반드시 대종교가 발전해야 한다고 확신했으며, 대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국민의 민족정신이 그만큼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규식은 상해로 건너온 후 대종교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매주 교우들과 경배를 올렸는데, 당시 활동했던 대종교 중심 인물들로서는 조완구․김두봉․백순․박찬익․정신 등의 많은 사람들이 활동했다. 그리고 매년 어천절(御天節)과 개천절(開天節), 그리고 국치기념일(國恥紀念日)에는 반드시 상해에 있는 교포들을 모두 모아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사실 신규식이 개인적 영달과 영예를 뒤로 접은 채, 오로지 우국일념의 정치․외교적 저항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위와 같은 대종교라는 정신적 힘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증언이 이를 대변해 준다.

“매일 아무리 바쁘셔도 새벽과 밤에는 반드시 우리 나라 開國의 國祖 檀君의 神像을 向해 香을 피우시고 拜禮를 두 차례 하시고 아울러 묵도로써 하루바삐 革命을 일으켜 山河를 光復하고 깊은 물과 불같은 고생 속에 묻힌 三千萬 겨레를 救해낼 것을 비셨다.”

한편 독립운동의 방략으로써 중국 당국과 처음 접촉을 시도한 사람도 신규식으로, 그는 중국에 건너 온 후 송교인(宋敎仁)과 친분을 시작으로 황극강(黃克强)․진기미(陳其美) 등 중국혁명동지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이름도 신정(申檉)으로 개명하고 중국동맹회에 가입한다.

그리고 1911년 10월 진기미를 따라 무창의거(武昌義擧)에 참가하면서 한국 독립지사로서는 중국 신해혁명에 투신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또한 신규식은 중국혁명지사들의 문학단체인 남사(南社)에 가입함을 인연으로 하여 환구중국학생회에도 참여함으로써, 인재양성을 위한 조직적 협조를 얻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이러한 대중국 접촉의 시도와 병행하여 신규식은 1912년 대종교계 인물들을 중심으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상해독립운동의 중심기구로 만들었다. 박은식이 총재를 맡고 신규식이 본부의 이사장직을 맡은 동제사는 그 구성원의 핵심인물들이 시민적 민족주의사상․개량적 사회주의사상․대동사상(大同思想)을 정치사상으로 하며 국혼(國魂)을 중시하는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대종교의 국교적 신앙을 공통으로 가졌던 점으로 보아 그들에 의해 경영되는 동제사의 기본이념과 독립운동방략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신규식은 진기미 등과 더불어 한국과 중국의 혁명지사들의 뜻을 교감할 수 있는 모임으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 조직에 앞장섬으로써, 후일 상해임시정부 조직의 발판을 마련함과 함께 대중국(對中國) 정치․외교의 중요한 토대를 구축한다. 사실상 이 단체의 중국 측 주요 인사들이 후일 손문(孫文) 광동정부의 주요직을 많이 맡았고 국민당정부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으므로, 상해임시정부의 수립과정에서나 수립 후의 정치․외교항쟁의 과정에서 중국혁명정부와의 긴밀한 유대가 가능했고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계획이 좀더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15년 신한혁명단이 결성되면서다. 신한혁명단 또한 신규식․박은식․이상설․유동열 등 대종교의 중심인물들이 주동이 되어 만든 것으로 당시의 세계정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망명정부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여 이후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 정부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한편 신규식 외에 신한혁명당의 규칙 및 취지서 기초를 맡은 박은식은 전술한 바와 같이 대종교 정신의 독실한 숭봉자였으며, 이 단체의 본부장으로 추대된 이상설 역시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북간도 노령(露領) 소학령(巢鶴嶺)에 설치한 대종교 북도본사의 총책임을 맡아 포교의 일선에 섰던 대종교의 중심인물이었던 점을 감안해 본다면 신한혁명단의 정신적 배경에도 대종교의 영향 어떠했을 것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신한혁명단 계획이 좌절된 후에도 신규식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박은식과 함께 상해에서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했다. 그리고 새로운 독립운동방안을 모색하던 중, 1917년 7월 대종교의 핵심인물인 박은식․윤세복․신채호․조성환․박찬익․한흥․홍명희․조소앙 등 14명의 명의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발표한다.
신규식이 중심이 되어 발표한 이 선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신호탄으로써, 전체 한민족을 통치할 통일기관은 대헌(大憲·헌법)을 제정하여 법치를 행하며 국민외교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통일국가'를 거쳐 '원만한 국가'로 발전하는 전 단계로서, 대한제국의 영토․국민․주권을 승계한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첫걸음이었다.

이렇듯 신규식은 철저한 조국독립의 신념 위에서 동제사 조직에서 임시정부결성까지, 살신성인 멸사봉공의 삶의 가치로 일관한다. 그리고 그의 굽히지 않는 신념의 중심에는 흔들리지 않는 대종교 신앙 또는 단군정신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주목되는 인물이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한 조소앙이다. 그 또한 대종교의 영향 속에서 후일 <무오독립선언서>선언문 기초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구상을 제시한 <건국강령(1941)>의 바탕 이론이며 김구를 중심한 한독당의 지도이념으로 자리잡는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완성한다.

그는 이미 ‘육성일체(六聖一體) 만법귀일(萬法歸一) 금식명상(禁食冥想)’의 종교를 1914년 1월 15일에 구상했다고 하며, 육성(六聖)을 사상과 연결시키면서 단군은 독립자강(獨立自强)에 불타(佛陀)는 자비제중(慈悲濟衆)에 공자는 충서일관(忠恕一貫)에 소크라테스는 지덕합치(知德合致)에 예수는 애인여기(愛人如己)에 마호메트는 신행필용(信行必勇)에 각기 연결시켰다.
여기서 특히 육성 중에 단군을 제일 으뜸으로 놓고 독립자강과 우선 연결시킴으로써, 그의 국교적 대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역시 대종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소앙 역시 1910년대 후반 대종교 동일도본사(東一道本司:동만주와 노령․연해주 관할) 소속의 교인으로 나타나 있지만,
정확한 입교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사실 조소앙 자신이 1913년 상해로 망명한 것도, 당시 대종교서도본사 총책임자이며 대표적인 이론가였던 예관 신규식과 연락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그가 활동했던 동제사의 핵심 구성원 역시 대종교의 중심인물들이었으며 박달학원도 신규식이 주관한 대종교 계통의 학교였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 동안에 대종교경전으로 ≪삼일신고≫(1912년 刊)․≪신단실기≫(1913년 저술)․≪회삼경≫(1913~1915년 집필)등이 나오고, 만주에서는 대종교의 독립운동단체인 중광단(1911년)이 조직되고, 1916년 나철의 구월산 순국 이후 대종교는 망국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굳어져 갔다. 따라서 조소앙도 이에 공명(共鳴)하여 <건국절단군소사연고(建國節檀君小史演稿)>를 통해 신지비사(神誌秘詞)를 다룬 적이 있고, 1922년 봄에는 대종교의 ≪삼일신고서문≫을 쓴 발해 고왕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大野勃)에 가탁(假託)한 ≪발해경(渤海經)≫을 꾸며 보기도 했다.

그리고 1918년 만주로 옮겨 간 후에도 대종교도인 윤세복․윤기섭․이시영․김좌진․황상규․박찬익 등과 접촉함으로써, 국교적 대종교관을 자연적으로 심화시켜 나아갔다. 그것에 대한 단적인 반증이 그가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 <무오독립선언서>에서 대종교의 경전 내용이 상당히 반영되고 있다는 점
이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그는 1922년 3월 1일 3․1운동에 대해 최초로 언급하면서도, 3․1운동의 의미를 새김에 있어 대종교의 연대를 따라 독립신(獨立神)이 삼한유족(三韓遺族)을 향해 독립운동자 중 일부의 변심과 탈선을 개탄․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조소앙 정치사상의 집대성이요 임시정부 이념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삼균주의 또한 대종교의 교리․교사와 밀접하다. 그는 <대한민국건국강령> 과 <한국독립당당의해석> 에서 단군의 홍익인간․이화세계를 평등의 최고공리(最高公理)로 내세우고 있다. 사실 조소앙이 내세운 이러한 주장의 유일한 역사․사상적 근거가 ≪신지비사(神誌秘史)≫에 나오는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 흥방보태평(興邦保太平)’이라는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의 가장 오래된 전거(典據)는 ≪고려사≫에 나오는 내용인데, ≪용비어천가≫ 제15장 주(註)에도 언급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지비사를 전하는 신지(神誌)라는 인물이 대종교경전 ≪신사기(神事記)≫를 보면 삼백 육십 육사(三百六十六事)를 주관하여 다스리는 삼선사령(三僊四靈)의 한 사람으로 다음과 같이 사관(史官)의 과업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근대에 들어와 이 ≪신지비사≫를 처음으로 언급한 인물도 단군신앙을 일으킨 나철이었다. 나철은 1914년 <제고령사제문(祭古靈祠祭文)> 과 1916년 순교(殉敎) 당시 유시(遺詩)로 남긴 <중광가(重光歌)>41장에서도 언급하고 있음을 볼 때, 조소앙 삼균주의의 역사적 근거가 되는 ≪신지비사≫ 내용 또한 단군신앙의 영향이 컸음을 암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조소앙은 ≪신지비사≫를 도참설(圖讖說)이나 종교적 비서(秘書)로만 보지 않고 균평(均平)의 근본원리를 밝힌 전거(典據)로 취하고 여기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이화세계(理化世界)의 건국이념을 연결시켜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중심개념으로 하려 하였음이 분명하다.

더불어 조소앙이 삼균주의를 통해 이르고자 했던 최고(最高)의 공리(公理)가 홍익인간․이화세계라는 것도, 곧 대종교가 독립운동의 궁극적 목적에 있어, 조국광복을 넘어 배달국 이상향을 지상에 건설하려는 사상적 배경과 일치된다. 즉 단군신앙의 교의(敎義)인 홍익인간과도 부합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아무튼 조소앙 삼균주의의 역사적 기초에 있어 가장 중요한 테마의 하나가 독립운동사 혹은 민족혁명사를 요약하고, 그 전통 위에 삼균주의혁명의 역사적 요청을 입증하여 삼균주의를 혁명이념으로 채택한 한국독립당이나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일에 있었다면 그 이론의 바탕에는 이처럼 대종교라는 정신적 배경을 통한 독립운동의 당위성 획득과 함께 독립운동지도자들의 일체단결을 위한 사상체계가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4) 사회주의투쟁 배경으로서의 단군

단군 혹은 대종교와 사회주의투쟁은 일면 생소한 느낌마저 준다. 그동안 대종교와 관련된 사회주의운동에 관한 접근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자에 발견된 성세영의 ≪본사행일기(本司行日記)≫
라는 자료는, 일제하 단군 관련 사회주의운동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일기에는 당대 경상도 교인명부에 사회주의운동의 거물이라 할 권오설과 권오상․안기성 등의 이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대종교는 본디 대사회주의적(大社會主義的)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는 집단이다. 대종교의 궁극적 지향점이 홍익인간임을 보더라도 파악된다. 구태여 홍익인간과 사회주의를 구별한다면, 전자가 철학성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정치성을 중시한다는 차이일 것이다. 일찍이 신채호나 신백우, 조소앙이나 안재홍 등의 사상적 배경에 대종교의 이념이 투영된 배경에도 이러한 성격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일제하 대종교 관련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상태였다.

본디 대종교는 나철의 유언에도 나타나듯이 철저히 현실 정치에 관여함을 금기시했다. 더욱이 1920년대의 사회주의운동에 대해서도 상당한 경계와 함께 거리를 두었다. 1917년에 반포된 다음의 「계명(誡命)」에서 그 이유가 발견된다.

“一, 宗敎와 政治는 區分이 懸殊하니 大敎를 信奉하는 人은 政界上 輕動이나 妄談함이 不可함.
一, 社會主義와 過激한 言動은 大敎門의 主唱煽動할 바가 아닌 즉 切勿浸梁하고, 吾敎規制는 普通集會와 逈異하니 誤解妄動함을 不得함.
一, 他敎門을 毁謗함은 道義上 不可할 뿐 아니라, 先宗師 遺誡가 自在하니 常須注意하되, 勿論 何敎門하고 先哲에게 言辭間 失敬함을 不得함.
一. 天序恪守는 吾敎規制인 즉, 以少凌長하며 以老輕幼하여 損失體面함을 不得함.
一, 前四項을 違背하는 者는 卽 我敎規를 無視함이니, 輕則停敎하고 重則黜敎함.“

즉 정치에 관여함을 금하는 동시에, 사회주의와 과격한 언동에 대해서도 일체 물들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더욱이 이를 위반할 시에는 정교(停敎) 내지는 출교(黜敎)를 시킨다는 마지막 계명에서, 대종교가 사회주의 활동에 대해 얼마나 부담을 가졌는가를 알 수 있다.

사회주의운동은 1920년대에 신사상연구회가 탄생하면서 고개를 든다. 이때의 신사상이란 사회주의로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를 일컫는 것이다. 처음 무정부주의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 사회주의가,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 무렵을 전후하여 공산주의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 된 것이다.

사회주의운동은 계급투쟁의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느 경우라도 민족해방의 과제를 방해한 일이 없는 민족운동의 범주에 속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찍이 조지훈이 일깨운 다음의 외침을 눈여겨 볼 일이다.

“우파 민족운동이 일부 자치를 운동하는 등 일제통치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무력화되어 갈 때, 이것하고는 대조적으로 사회주의운동이 세차게 대두되었다.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은 식민통치하의 민족해방이라는 대명제에 기본적 제약을 받는다. 때문에 일제하의 민족운동은 ‘민족적 사회주의․사회주의적 민족주의’의 색채가 진작부터 짙었고, 이러한 상호 영향의 요소 때문에 8․15 전까지 사회주의운동은 민족광복운동사에서 제외될 수 없다.”

대종교 사회주의운동의 인물 중, 먼저 김두봉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누구보다도 대종교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으로 외면 받은 인물이다. 김두봉은 주시경의 수제자로서 주시경이 우리말본을 짓고 가르치는 일에 온 정성을 다하는 동안 사전 만드는 일에 온 정성을 쏟았다 한다. 그러나 1914년 주시경이 세상을 떠나자 스승이 못다 한 일을 이어 받아 그것을 더 넓히고 더 열어서 우리의 말과 글과 얼이 묻히지 않고 영원히 자랄 수 있는 기틀을 다지기 위해 ≪조선말본≫을 저술한 인물이다. 당시 ≪조선말본≫은 그 때까지 발표된 문법학설로는 가장 깊고 넓게 연구된 대표적 권위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두봉은 스승 주시경으로부터 대종교적 가치관도 계승받는다. 그러한 판단에 대한 단적인 근거는 그가 보여 준 대종교에 대한 참여와 애착이다. 즉 그는 나철의 수제자로서, 1916년 대종교를 일으킨 나철의 구월산 봉심(奉審)에 수석시자(首席侍者)로 동행을 했다.

또한 김두봉은 중국 상해 시절에도 개천절경축회석상에서 개천절에 대한 역사를 해박한 지식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오늘은 단군께서 우리나라를 처음 세우신 건국기념일이라…(중략)…독립을 선언한지 올해까지 3년 동안 국경일로 지냅니다. 이제로부터 13년전에 대종교 곧 단군이 세우신 종교가 부흥하게 됨으로부터 그 敎中에서는 이 날을 기념하여……단군이 건국하신 후 단군조는 물론이고 그 뒤를 계승한 역대의 모든 나라들이 다 단군의 건국위업을 기념하기 위하야 월일을 택하여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역대로 그 기념의 명칭과 의식과 그 월일의 차이는 불무하나 단군을 건국시조라 하야 그를 불망함이 건국을 기념함으로 생각함은 역대의 공통된 정신으로 볼 수 있으며…(중략)…교조로 신봉하여 기념함도 사실이었습니다. 명칭으로 말하면 삼한의 천군제라던지 부여의 영고회․예의 무천회․箕氏의 報本祭․고구려의 동맹회․신라의 太白山祠․백제의 四仲祭․발해의 檀戒祝․遼의 君樹祭․金의 長白山柵․고려의 三聖祠祭․조선의 崇靈殿祭 등이 이명동체의 기념이올시다. 의식으로 말하면 삼한, 부여, 예, 고구려 등 모든 나라에서는 전국의 공동거행으로 삼한은 대표자를 선출하여 國邑에 祭하고 그 남아 세 나라는 민중이 會集頒祝하였으며 箕氏, 신라․발해, 遼金, 고려, 조선 등 모든 나라는 國君이 親祭하거나 혹 降香代祭하였습니다.…(후략)….”

이것은 김두봉의 대종교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대종교의 등장을 창교가 아닌 부흥(復興:다시 흥함)으로 이해하고 있고, 단군을 대종교의 창교주로 인식했다는 점, 그리고 역대 단군신앙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꿰뚫어 개천절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대종교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를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김두봉이 문화운동을 넘어 사회주의사상운동에 뛰어든 배경에는, 문화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이 선 듯하다.
1929년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여 비서장이 되었으며, 1932년에는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혁명당․한국광복동지회 등의 동지들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이어 1935년에는 한국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37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바뀐 후에도 적극적인 참여를 지속했다.

흔히들 김두봉을 평함에 있어, 조선적인 것은 무엇보다 사랑하고 자랑하고 싶은 민족애에 사로잡힌 사람으로서, 종래의 역사 관념을 그대로 계승하여 배달민족으로서 조선인의 긍지를 가진 완고한 국수주의자라고 말한다. 또한 대종교에 종사한 이론가이면서 과학적 혁명이론으로 무장한 역전의 투사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대종교에 심취하여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려고 꾸준히 노력했던 인물임을 확인해 볼 때, 그의 국어사랑과 나라사랑 그리고 이념운동의 정신적 배경 역시 대종교에 있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홍명희 역시 주목되는 인물이다. 1923년 신사상연구회 및 그 후신인 화요회(火曜會)에 권오설 등과 참여했으며, 한때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1927년 시대일보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신간회 결성을 주도면서 민족사회주의운동에 앞장 선 인물이다. 그에 대한 왈가왈부가 많지마는, 분명한 것은 홍명희가 마르크스주의자보다 사회주의에 공명하는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평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공산주의자와 비타협적이었던 신간회의 핵심간사로 활동했던 것은 그의 사상이 중도적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음을 대변해 준다.

홍명희 역시 대종교의 기반 위에서 그의 사상적 외연을 넓혀 갔다. 그의 고모인 홍정식이 조완구의 부인으로서, 두 사람의 대종교적 영향을 크게 받는다. 조완구는 경술국치 이전 박은식과 함께 대동교를 창건하여 유교개혁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지만, 1909년 대종교의 등장과 함께 대종교에 입교하여, 1910년 대종교 시교사로 임명되었으며, 나철의 신뢰를 깊이 얻어 대종교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홍명희의 고모인 홍정식 역시 여동생 홍근식과 함께 1916년 3월 18일에 대종교 참교의 교질을 받았음을 볼 때, 1916년 말에 이미 대종교에 입교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홍정식은 1917년 3월 18일 지교로 그의 교질이 오르는데, 당시 대종교단 내에 여자로서 지교 이상의 교질은 4명(기길․유정후․강의경․김덕이) 뿐이었다.

홍명희 역시 1910년대에 이미 대종교남도본사의 교인이었으나, 대종교단 내에 입교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해방 후 대종교총전교까지 지낸 정원택이, 홍명희․김덕진․김진용 등과 함께한 ≪지산외유일지(志山外遊日誌)≫의 내용들과, 홍명희의 상해생활 당시 신규식의 기록을 고려한다면, 홍명희가 대종교와 늘 함께 있었음이 확인된다. 더욱이 상해시절 신규식이 홍명희를 떠나보낼 때, 대종교천궁(단군대황조를 모셔 놓은 장소)에서 종교의식을 거행하며 읊조린 다음의 시구를 참고할 수 있다.

“聞名江戶才華富, 握手中原肝膽披, 昭告天宮皇祖在, 宣盟海上偉人知, 倂生一世寧無意, 好伴靑春可有期, 此去萬山千水路, 願君珍重勉旃之.(뛰어난 재주로 세상에 이름 떨치니 / 이역 땅에 손잡으며 속마음 펼쳤어라 / 한배검 계신 천궁에 밝게 고하니 / 상해에서의 맹세 위인도 아는구나 / 세상 한 번 태어남은 우리 의지 아녔건만 / 좋은 청춘 더불어 또 만날 수 있으리라 / 이번 떠나는 길 험하고도 험하리니 / 보배로운 자네, 몸 중히 여기시게. -인용자역)”

박일병․박순병 형제의 사회주의운동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형제의 행적에 대해서는 대종교단 내에서의 기록이 거의 없고 입교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특히 박일병은 대종교청년회장으로도 많은 활동이 있음을 볼 때 아쉬움이 크다.

박일병은 1911년 일찍이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2년 7월 27일 대종교 참교의 교질을 받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15년 11월 13일에 김연필․이신직과 같이 지교의 교질로 승급했다.
박일병과 같은 날 지교를 받은 김연필은, 시인 이상(본명: 김해경)의 큰아버지로 후일 이상의 양부(養父)가 되는 인물이다. 또한 박일병의 동생인 박순병은 1922년 1월 23일 대종교의 참교를 받은 기록으로 본다면, 1921년에 대종교에 입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일병은 박춘도라는 필명으로도 불리었으며, 1907년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룽징춘[龍井村]에 설립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필업했는데, 이 시기 대종교에 입교한 듯하다. 1913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와세다대학 문과에 입학하였으며, 1920년에는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귀국하여 1920년 김광제가 회장을 맡은 노동대회(勞働大會) 총무를 시작으로, 대종교의 중진 유근이 편집감독을 맡은 ≪동아일보≫의 논설반(論說班)에 합류했다. 1921년 중광절(음력 1월 15일로 대종교가 다시 일어난 날)을 기해 대종교청년회가 주최한 강연회에 ‘종광(宗光)’이란 주제로 강연함과 함께, 그 해 개천절에는 송진우(강연주제: 종교와 인생)․권덕규(강연주제: 대종교)와 함께 ‘군생의 환희’라는 주제로 강연을 함은 물론, 대종교청년회 회장으로도 본격 활동을 폈다.

그리고 1922년 조선학생대회(朝鮮學生大會) 주최로 열린 종교강연회에서는 대종교의 대표로 참여하여 불교 대표 한용운․천도교 대표 이돈화와 함께 강연회를 갖기도 했다.
특히 그는 그 시대 최고의 웅변가로도 알려졌는데, 다음의 일화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한참 당년은 金明植, 張德秀, 金昶濟 氏등과 가치 一世의 雄辯客으로 일홈을 날니든 春濤 朴一秉 氏가, 어느 때에 氏 獨特의 음성과 「제스치아」를 盛히 써가며 연설하고 잇슬 때에, 겻헤서 그것을 바라보고 잇든 경찰 측의 모 일인 고관이, “戰時가튼 때에 國債募集하는 연설을 식혓스면 훌융히 성공할 것 갓다.”하고 탄복하기를 마지 안엇다고.“

그러므로 시인 황석우는 당대 최고의 웅변가로 박일병을 꼽으면서

“君(박일병-인용자주)도 安씨(안창호를 말함-인용자주)와 가티 만흔 시비를 가즌 인물. 그러나 그말 재조에 잇서서는 누가 무어라 한 대도 朝鮮의 단 한아의 존재이엿다. 그는 참으로 李朝 500년 이후에 처음난 웅변가, 君에게 근대학적 수양이 좀더 잇섯드면 그의 웅변은 日本에도 그짝이 업섯슬 것이다.

그 청산유수의 辯에야 醉치 안을 사람이 뉘가 잇섯스랴? 朴군은 咸北이 나흔 朝鮮근대의 말의 거인! 安씨도 金昶濟씨도 朴군의 말압헤는 다리를 도사리지 안을 수 업섯슬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君은 년말급 40에 불행하게도 失明, 그 후에 또한 불치에 갓갑운 病軀가 되얏다. 지금 朴군은 鄕里에 도라가 靜養중. 그는 몸만 왼만치 회복되면 맹인의 몸으로도 다시 단상의 人이 되야, 말노 그 일생을 始終하겟다 한다. 오! 朴군의 거듭나는 그 懸河의 辯을 다시 들어볼 날이 언제올는지? 불행한 朴군아! 幸히 그 雄姿을 세상에 다시 나타내는 사람이 되여지라.”

고 예찬했다. 조선조 500년에 최고의 웅변가, 일본에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웅변가, 조선 근대의 말의 거인(巨人), 안창호도 두려워했을 웅변가, 그가 바로 박일병이었다.

그는 1921년 소작인대회를 조직하여 소작인 권익운동에 적극 나서는가 하면, 1922년 1월 윤덕병․신백우․이준태 등과 무산자(無産者) 상호의 친목과 구제를 목적으로 무산자동지회를 조직하였고, 그해 12월 장덕수․오상근 등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한 뒤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3년에는 홍명희․홍증식․구연흠 등과 함께 사회주의 단체인 신사상연구회(화요회의 전신)를 결성하였고, 1924년 2월 김찬․윤덕병․백광흠 등과 함께 신흥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전형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24년 11월 화요회(火曜會: 신사상연구회 후신)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 후 1925년 8월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1926년 4월 화요회․북풍회․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 등의 통합단체인 정우회(正友會)에 가입 활동하였고, 그해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 때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시력을 거의 잃어 병보석으로 출감케 된다.

박순병 역시 1924년 신흥청년동맹에 박헌영․김단야․조봉암 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사회진화를 통한 새사회 건설과 무산계급청년들의 단결이라는 사회주의운동에 힘을 쏟았다.
1925년 인쇄직공청년발기대회에서 선전 연설하였다는 혐의로 구속되는가 하면, 1926년 󰡔시대일보󰡕에 재직 당시 ‘제2차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면서, 온갖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요절하였다.

당시 박순병 죽음의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동업 시대일보 긔자로 잇스며 사상운동의 선구로 맹렬한 활동을 하든 박순병씨는 재작이십오일 오후 다섯 시경에 회생의원에서 맹댱염이라는 병으로 세상을 나고 말엇는데, 씨는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가치 한양청년련맹 집행위원으로 잇스면서 사상운동에 맹렬한 활동을 하든 바, 지난 번 주의자 검거 당시에 종로경찰서에 톄포되여 가진 방면으로 심문을 당하든 중 병을 어드니, 맹댱염이라는 것이 되어 즉시 총독부의원에 입원하야 수술을 밧엇으나 수술 후 분루(糞瘻)라는 여병이 발생하야 생명이 위독하게 되엿슴으로, 지난 이십삼일에 그곳을 퇴원하야회생의원에 입원하야 다시 치료를 바덧스나 결국 효험이 업시 이십사세라는 젊은 일생을 맛치고 마럿는데…….”

라고 적고 있다. 결국 박순병은 감옥에서 얻은 맹장염과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이다. 마지막 숨을 걷는 자리엔 그의 친형인 박원병과 조카 2명, 그리고 종로경찰서 구마모토[熊本] 순사가 있었다 전한다.

성세영의 ≪본사행일기≫에 나타나는 권오설과 권오상, 그리고 안기성 역시 당대 사회주의운동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그들은 모두 안동군 풍서면 가곡리(현 가일마을) 출신으로서, 세상 사람들이 그 곳을 모스크바동네라고 부를 정도로 사회주의운동자들이 많이 나온 곳이다.
권오설은 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경북고등학교의 전신) 재학 중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퇴학당하여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광주로 내려가 전남도청에서 근무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복역하였다.

그 후 권오설은 귀향하여 학술강습소를 열어 몽매한 농촌을 계몽시키는 데 주력했고 농민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섰다. 권오설에 대종교에 입교한 시기도 바로 이 시기로 파악할 수 있다. 권오설이 동향선배 이준태․김남수 등과 함께 23년 풍산소작인회를 만들고, 이 조직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는데, 이를 계기로 활동무대를 경성으로 옮겼다.

경성으로 올라온 권오설은 1923년 사회주의 단체인 화요회 및 북풍회와 연관이 있는 화성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김단야․신철수등과 함께 마산에서 조선공산당 마산지부 창당준비를 지도하였다.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2월에는 박헌영 등 고려공산청년회 지도부 다수가 체포되자 제2대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6년 4월 박래원․민창식 등과 함께 6․10만세사건을 계획하였고,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되었다. 5년형을 선고받은 권오설은 형무소 안에서도 심문과정에서 폭행과 고문을 자행한 일제 경찰을 고소하는 고문사건항의운동까지 전개하며 일제에 대항했으나, 복역 도중 1930년 4월17일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

권오상은 권오설의 족제(族弟)로 중앙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학생부문의 일을 담당했다. 1925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고 고려공산청년회 및 조선공산당에 가입, 조선공산당원으로 학생과학연구회를 조직 적극 활동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에 직접 참가해 군중을 지도하다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3년간 복역했으나, 일제 경찰에 당한 고문의 후유증이 출옥한 후에도 회복되지 않아 죽음을 맞는 인물이다.

안기성도 1924년 홍명희․박일병 등 대종교계 인물들이 가담한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화요회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전개한 인물이다. 1925년 2월에는, 화요회가 전조선운동의 조직적 통일과 근본 방침을 토의하기 위하여 주도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김하구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 때 소련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안기성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東滿區域局) 책임비서로 활동하고 있었다.

3. 나아가는 말

행동에는 반드시 가치가 작용한다. 그것이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인간의 의식이 인간의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다. 특히 집단적 신념에 의한 인간행위의 규제는 그 어떠한 가치규제보다 강하다. 우리에게 단군이라는 의미는, 우리 민족 집단 신념의 원초적 동력이었다.

단군 또는 대종교라는 정신가치가 우리 민족 현대사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민족사회 전반에 혁명적인 반향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양상임을 볼 때, 획기적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와 같은 단기간의 혁명적 영향력의 배면에는, 대종교 또는 단군에너지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바닥에 연면히 흘러온 단군신앙의 현대적 부활로써, 당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대종교를 신앙 또는 국조숭배를 통한 국교적(國敎的) 정서로 인식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대종교 또는 단군정신의 항일투쟁 양상 또한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무력적인 측면이나 문화적인 측면, 그리고 사상적 측면 등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 정신적 배경은 역시 일치가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대종교의 중광을 통한 단군신앙의 부활은 민족의 성지인 배달국토를 되찾아야 한다는 주권적 명분과 함께 배달국이상향 건설이라는 종교적 명분이 동시에 작용했던 것이다.

주시경․지석영․김두봉․이극로․최현배 등으로 대표되는 한글운동의 배경이나, 김헌․박은식․신채호․류근․정인보․이상룡 등 민족주의사학의 바탕, 그리고 신규식․이동녕․박찬익․조성환․조소앙․홍명희․박일병․권오설 등의 활동으로 조성되는 사상투쟁의 토대에는 대종교라는 정신적 배경이 굳게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중광단․북로군정서․신민부․흥업단․광정단․한족연합회 등등 대종교 무력투쟁의 배경에도 교학일여(敎學一如)를 통한 군교일치(軍敎一致)의 정신이 지탱하고 있었음은 물론, 상해임시정부 태동의 배경이나 활동에서 단군 또는 대종교의 정신 깊숙이 숨쉬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일제하 민족운동의 정신적 배경에 있어 대종교를 일으킨 나철을 비롯한 김헌․서일․윤세복 등, 이 네 사람의 정신적 영향력은 실로 지대했다. 그것은 그들이 단군정신 또는 대종교를 상징하는 인물들로서, 수많은 교도들을 거느리고 그들 스스로가 개인의 영달과 명예를 뒤로 한 채 멸사봉공(滅私奉公)을 통한 살신성인의 길을 기꺼이 걸어갔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정신을 통한 항일투쟁의 과정에서 종교나 이념을 초월하여 단군정신으로 합심하였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경험이 일깨우는 바와 같이, 우리에게 있어 단군의 상징적 의미가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준 교훈이었다. 한편 투쟁의 질적(質的)인 면에서도 단순한 증오와 구축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철학이 있는 싸움․정사(正邪)를 구별하는 싸움을 가능케 한 것도 바로 단군이데올로기다.

이것은 단군정신의 궁극적 지향점인 홍익인간이라는 철학적 속성 자체가 ‘너와 나’가 아닌 ‘우리’를 지향하는 삶이요, ‘닫힌 사회’를 넘어 ‘열린 사회’를 도모하는 것이며, ‘끼리만 사는 가치’가 아닌 ‘더불어 사는 가치’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근자에 회자되는 민족에 대한 세계주의적 해석의 가능성도 열어두었던 것이다. 끝으로 단군의 홍익인간을 인류가 지향할 이상으로 제시했던 백범 김구의 다음과 같은 말에 우리 모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공자․석가․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 세운 천당․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는 아니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