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발표내용.

 

국학원(사) 부설 광복의병연구소는 1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신흥무관학교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새로운 한·일 관계의 모색'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광복회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한민족정신지도자연합회 B&B코리아와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걸 국회의원 등이 후원했다.

학술대회에서는 한ㆍ중ㆍ일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꿈꾸었던 우당 이회영 선생의 평화정신을 살펴보고, 그 정신 속에 흐르고 있는 단군의 '홍익사상'에 대해 조명함으로써 21세기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새로운 한ㆍ일 관계의 해법이 제시되었다.

첫 번째 발표자 이덕일 한가람연구소장은 '한ㆍ중ㆍ일 평화공동체를 꿈꾸었던 우당 이회영의 삶과 사상'을 주제로 발표했다. 이 소장은 "우당 이회영은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으로서 6형제 모두가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던 인물로 유교적 가치관이 팽배했던 시기에 노비, 적서(嫡庶)의 차별 등 신분적 속박과 봉건적 인습을 타파하려 했다."며 그의 실천적 삶을 조명했다. 또한 한ㆍ중ㆍ일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여 각 개인과 국가의 완전한 자유와 평화가 보장되는 국제평화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했던 우당 이회영의 평화주의적인 면모에 대해 발표했다.

<발표내용 전문>

우당 이회영의 한․중․일 평화공동체 사상

이 덕 일*
* 한가람연구소 소장

1. 들어가는 글
2. 유교에서 신사조를 받아들이다
3. 항일무장투쟁
4. 동아시아 평화사상과 아나키즘

5. 양명학과 아나키즘
6. 순국
7. 나가는 글

1. 들어가는 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선생은 삼한갑족(三韓甲族) 출신으로서 6형제 모두가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던 인물이다. 이회영 일가는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형이고, 이회영은 저명한 양반 출신으로서 아나키스트가 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이회영의 부친 이유승(李裕承)은 종1품 좌찬성(右贊成)과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둘째 형 석영(石榮)이 양자로 들어갔던 이유원(李裕元)은 영의정을 역임했을 정도로 고위 벼슬아치가 많이 배출되었다.
이 글은 우당 이회영의 삶과 사상을 돌아봄으로써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비전을 모색하고자 한다.

2. 유교에서 신사조를 받아들이다

우당 이회영(李會榮)의 가문은 유명한 유학자 집안이었다. 이회영의 부친 이유승(李裕承)은 우찬성과 행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鄭順朝)의 따님으로서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회영은 삼한갑족의 기득권에 매몰되지 않고 신학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회영과 함께 활동했던 이관직(李觀稙)은 “선생(이회영)은 이상설과 숙의하여 이상설의 집에 서재를 설치하고, 여기에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이강연(李康演) 등과 함께 담론하였다. 또 정치·경제·법률·동서양 역사 등의 신학문을 깊고 정밀하게 연구” 했다고 기술했다.

또한 이회영은 1908년 10월 이은숙과 상동예배당에서 혼인했는데, 기독교인의 숫자가 극소수에 불과했던 당시에 교회를 혼인 장소로 삼은 것에서 이회영의 신사조 적극 수용 정신을 알 수 있다. 또한 상동교회 전덕기(全德基) 목사와는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해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 방침을 정하기도 했다.

이회영은 기우는 나라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 사업이라고 보았으며 망한 나라를 되세우는데도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회영은 전국 규모의 통일된 교육 운동이 필요하다고 보고, “국민 교육에 관해서는 기호(畿湖)·서북(西北)·교남(嶠南:영남)·호남(湖南)·관동(關東) 등의 다섯 학회의 지우들을 통하여 전국의 교육을 협의·장려” 했다고 전한다.

이회영은 이동녕·안창호·이승훈·박승봉 등과 협의한 후 김사열(金思說)은 평양 대성학교에, 이강연은 정주(定州) 오산학교에, 이관직은 안동 협동학교에, 여준은 상동(尙洞) 청년학원에 교사로 파견했다.

해외 망명 후에도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데서 알 수 있듯이 교육을 통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 했다. 또한 되찾은 나라를 바로 세우는데도 교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훗날 󰡔상록수󰡕를 쓰는 소설가 심훈(沈熏)의 회상에 따르면 이회영은 심훈이 연극 공부를 하러 불란서에 유학가고 싶다고 말하자 “너는 외교가가 될 소질이 있으니 우선 어학에 정진하라”면서 간곡히 부탁을 했다고 전한다.

이회영이 심훈에게 외교가가 될 공부를 권한 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외교관이 되라는 뜻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회영은 나라를 되찾으면 사회 각계에 인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심훈에게 외교가가 될 준비를 하라고 권했던 것이다.

3. 항일무장투쟁

우당 이회영 일생의 특징은 교육사업과 무장투쟁을 병행했다는데 있다. 이회영에게 교육사업과 항일무장투쟁은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였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사였던 이관직은 “경학사(耕學社) 안에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 이름을 신흥학교(新興學校)라 하였으며 본과와 특과의 두 과정을 두었다. 본과는 보통 중학 과정이었는데…특과는 군사학을 전수하는 과정으로서 교두(敎頭)에 이관직, 대장에 이장녕(李章寧), 두 사람이 각각 임명되었으며, 학교장에는 선생의 형인 이철영이 추대되었다” 고 회고하고 있다.

 신흥무관학교는 일반 교육과 무관교육이 하나로 결합되었으며, 또한 일하면서 배우는 생활 공동체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국경지방시찰복명서(國境地方視察復命書󰡕에는, “(신흥무관학교의) 생도는 농사를 짓고 실업에 힘쓰면서 또한 학과를 수업하는 취지로서 교복으로 농천(濃淺) 황색(黃色)의 힐금(詰襟)의 자켓을 입고 제모(制帽)를 썼다” 고 전하고 있다. 생활과 교육과 군사가 하나로 결합된 것이 경학사-부민단-신흥학교였으며 그랬기에 이 조직은 조선총독부에서도 강고하다고 평가했다.

이회영은 북경으로 재차 망명한 후에도 무장항일투쟁을 가장 급선무로 생각했다. 석주 이상룡(李相龍)의 「연계여유일기(燕薊旅遊日記)」에는 “경신(庚申:1920) 섣달 보름에 성준용(成俊用) 군이 연경에서 돌아와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의 취지를 전하였다. 거기다 우당 이회영과 우성(又醒) 박용만(朴容滿)의 의사를 전하는데, 여비를 보내며 초청하는 뜻이 매우 간절하다.” 고 전하고 있다.

이 사료는 이회영이 박용만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 결성의 주모자였음을 보여주는데, 1920년 9월 국내와 서북간도, 러시아 령의 대표가 모여 결성된 군사통일촉성회에서 이회영은 박용만(朴容滿), 신채호(申采浩), 신숙(申肅), 배달무(裵達武), 김대지(金大池), 김갑(金甲), 장건상(張建相), 남공선(南公善) 등과 함께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군사통일촉성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중심 정책에 문제를 제기했던 국내외 여러 지역의 항일독립운동가들이 결성한 조직이었다. 비록 이 단체는 여러 사정으로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지는 못했지만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려던 목표를 추구했던 단체였다.

우당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 등을 통해 정규 독립군을 배출하고 결정적 시기에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해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기본 방략으로 삼았지만 이회영의 무장투쟁 방침은 반드시 정규 독립군에 의한 투쟁에 국한되지 않았다.

 우관(又觀) 이정규는 “선생의 둘째 형 이석영의 아들 규준이 몇몇 동지들과 ‘다물단(多勿團)’이라는 직접 행동단체를 조직하게 되어 선생이 이 운동의 정신과 조직요령을 지도하였다.”라고 회고하고 있듯이 소규모 전위요원에 의한 직접행동도 적극 전개했다.

 이정규는 또 1931년 10월 말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한국인·중국인·일본인 아나키스트들이 합작해 결성한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할 때 “선생이 최고의 원로로서 의장이 되어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했다.” 고 전하고 있는데, 화암 정현섭은 “항일구국연맹은 주로 적의 기관파괴와 요인암살, 친일분자의 숙청, 배일선전 등을 목적으로 했다. 이의 실행을 위하여 행동대를 편성했다. 이른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이다” 라고 전하고 있다.

항일구국연맹과 흑색공포단은 복건성 하문의 일본영사관을 폭파하고, 천진에서는 일본의 군수 물자를 싣고 들어온 일청기선과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져서 영사관 건물 일부를 폭파시키는 직접행동을 전개했는데, 정현섭은 ‘우당 이회영이 이 행동대를 지휘하였고’, 중국인 왕아초(王亞樵)는 재정과 무기공급책임을 수행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회영은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유일한 방략은 무장투쟁이라고 생각했다. 1932년 일본이 점령한 만주로 향한 것도 이런 신념을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4. 동아시아 평화사상과 아나키즘

우당 이회영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의 평화사상의 전모를 알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회영은 인간과 국가 모두가 억압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평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회영의 이런 생각은 비단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이후에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이회영은 만주로 망명하기 이전부터 인간을 속박하는 신분제 등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갖고 있었다. “약관(弱冠)이 지나면서부터는 선생 스스로 솔선하여 불평등한 봉건적 인습과 계급적 구속을 타파” 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회영은 “이서(吏胥)와 노비에 대한 차별적인 언사부터 평등한 경어(敬語)로 개(改)하려 노력하였으며 적서(嫡庶)의 차별을 폐하고 개가·재혼을 장려 단행”했다고 전한다.

인간이 신분이나 계급, 성별에 의해 속박 받을 때 평화가 깨진다는 점에서 이회영은 선천적인 평화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회영과 시야(是也) 김종진(金宗鎭)과 함께 활동하던 회관(晦觀) 이을규(李乙奎)가 집필한 󰡔시야 김종진 선생전󰡕에는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후 형성한 평화사상을 알 수 있게 하는 내용들이 일부 수록되어 있다. 김종진은 운남(云南)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만주로 가던 도중 이회영을 방문했다. 이때 이회영은 김종진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자유 평등의 사회적 원리에 따라서 국가와 민족 간에 민족자결의 원칙이 섰으면 그 원칙 아래서 독립된 민족 자체의 내부에서도 이 자유평등의 원칙이 그대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니까 국민상호간에도 일체의 불평등, 부자유의 관계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한 나라의 각 개인은 자유롭고 평등해야 하고, 이런 개인들이 모여 조직한 각 국가와 민족도 서로 평등한 관계 위에서 민족 자결의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회영과 김종진은 아나키즘의 궁극적 목적은 ‘대동(大同)의 세계’라고 정의했다. 대동의 세계란 “각 민족 및 공동생활 관계를 가지는 지역적으로 독립된 사회군(社會群:국가군)이 한 자유연합적 세계 연합으로 일원화”되는 사회를 뜻한다.

즉 “각 민족적 단위의 독립된 사회나 지역적인 공동생활권으로 독립된 단위사회가 완전히 독립된 주권을 가지고 자체 내부의 독자적인 문제나 사건은 독자적으로 해결하고 타와 관계된 것이나 공동적인 것은 연합적인 세계기구에서 토의결정” 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회영의 평화사상은 모든 개체의 독립과 자유, 평등의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각 개인 사이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각 개인이 소속되는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갖는다. 각 지방 자치체의 연합으로 국가를 구성하며, 각 국가의 연합으로 국제기구를 구성하는데 국제기구에서 각 국가는 완전한 독립과 평등의 권리를 누린다는 것이다. 다만 국가 사이의 이해가 상충될 때만 세계기구에서 서로 토의하여 합의안을 도출하는 방식으로 세계평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1931년 이회영이 의장으로 결성된 항일구국연맹은 한국인과 중국인은 물론 일본인들도 가담했는데 여기에도 마찬가지 원칙이 적용되었다. 각 개인과 각 공동체 사이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다면 국제평화는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회영은 실증해 보였던 것이다.

이회영은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로 불렸던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의외라는 인식을 주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포진한 기호파에 속하는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민족주의 노선을 선택했지만 이회영은 가장 급진적인 아나키즘을 선택했고 이를 평생의 사상으로 유지했다.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 천품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이정규도 이회영이 “자유 평등의 천품” 을 지니고 있었다면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기 이전부터 인간을 속박하는 신분제 등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기술했다.

물론 선천적인 성향도 중요하겠지만 이것만으로 삼한갑족 출신의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수용한 이유를 설명하기는 충분하지 않다.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한 시야(是也) 김종진(金宗鎭)이 천진 우거(寓居)를 찾아와 “무정부주의로 전향한 동기”에 대해서 물었을 때 한 이회영의 대답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내가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가 되었다거나 또는 전환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한국의 독립을 실현코자 노력하는 나의 생각과 그 방책이 현대의 사상적 견지에서 볼 때,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것과 서로 통하니까 그럴 뿐이지 ‘覺今是而昨非’식으로 본래는 딴 것이었던 내가 새로 그 방향을 바꾸어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이회영이 ‘지금 깨달으니 과거가 잘못되었다’는 ‘覺今是而昨非’의 결과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인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가 과거의 사상과 노선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아나키스트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상과 노선의 연장선으로 아나키즘을 수용했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했을 때 양반 사대부들의 반응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연구가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집단적 흐름으로 말하면 두 가지 기류가 나타났다. 하나는 일제의 대한제국 점령에 적극 가담한 수작자(授爵者)들 집단이 있었다. 1910년 8월 22일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한 일제는 그해 10월 7일 76명의 조선인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내려주면서 일본 귀족과 유사한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작의 작위를 수여해서 귀족으로 삼았다.

이들 대부분은 왕족이나 양반 사대부들이었는데 이들 중 왕족 등과 극소수 평민 출신을 제외하면 대부분 소속 당파를 분류할 수 있다. 소속 당파를 알 수 있는 인물은 64명 정도로서 북인 2명, 소론 6명, 노론 56명이다.

노론 수작자들 중에는 수작 거부자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지만 대다수가 노론인 수작자 명단은 인조반정 이래 집권당이었던 서인-노론이 집단적으로 매국에 적극 가담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당시 이완용의 비서였던 이인직(李人稙)은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小松錄)와 합병 조건에 대해 비밀 협상하면서, “이런 역사적 사실로 보면 일한병합이라는 것은 결국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일전(一轉)하여 일본으로 옮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는데, 이는 노론이 집단으로 망국에 가담했던 명분의 속내를 말해준다.

반면 집단 망명으로 일제 점령에 항거한 세력이 있었다. 이들의 당파적 배경은 대부분 소론 계열이며 사상적 배경은 양명학이었다. 민영규 교수는 “나라를 빼앗긴 것은 노론(老論)이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바위 위에 새우 뛰듯, 그저 뛰어다닌 것은 소론(少論)이었다” 는 이야기도 기록했는데, 그간 독립운동에 투신한 소론 계열 양반 사대부들의 사상적 기반에 대해서 연구된 바도 거의 없었다.

망국 당시 해외로 망명한 양반 사대부가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서울의 우당 이회영 일가, 경상도 안동의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일가, 충청도 진천의 홍승헌(洪承憲), 정원하(鄭元夏), 강화도의 이건승(李建昇) 등이 그들이다. 자결한 전라도 구례의 매천 황현이 홍승헌·이건승 등과 깊은 관계가 있은 인물이란 점을 감안하면 전국적 규모로 고른 망명과 순국이 행해졌던 것이다. 홍승헌·정원하·이건승 등은 양명학자들이다. 경상도 안동의 석주 이상룡은 망명 일기인 「서사록(西徙錄)」에서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를 읽고 그 소감을 적었다.

“대개 양명학은 비록 퇴계 문도의 배척을 당했으나 그 법문(法門)이 직절하고 간요하여 속된 학자들이 감히 의론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또 그 평생의 지절은 빼어나고 정신은 강렬하였다. 본원을 꿰뚫어 보되 아무 거칠 것이 없었으며, 세상의 구제를 자임하였으되 아무 두려움이 없었으니 한대(漢代)와 송대(宋代)를 통틀어 찾는다 해도 대적할 만한 사람을 보기 드물다. 또 그의 독립과 모험의 기개는 더욱 오늘과 같은 시대에 절실하다 할 것이다.”

‘송대를 통틀어 찾는다 해도 대적할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라는 말은 송나라 주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왕수인(王守仁:왕양명)을 주희보다 상위의 인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상룡은 나아가 “우리들 중 어떤 사람이 능히 의연하게 자임하여 300년간의 학설을 세속된 무리와 도전하여 결투할 것인가?” 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300년간의 학설이란 퇴계 이래의 성리학을 뜻하는데 이 학설과 ‘도전하여 결투’하자고까지 말하는 것은 양명학에 깊이 공감하고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이들의 망명은 사전에 국내에서 긴밀하게 협의한 끝에 이루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그 중심부에 우당 일가가 있었다. 재종조부가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이자 그 자신이 석주의 손부(孫婦)였던 허은(許銀) 여사는 두 집안의 망명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이시영 씨 댁은 이참판 댁이라 불렀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많이 하여 지체 높은 집안이다. 여섯 형제분인데 특히 이회영·이시영 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의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그러다가 합방이 되자 이동녕 씨, 그리고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과 의논하여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

안동의 석주 이상룡이 서울의 우당 이회영 일가를 알게 된 것에 대해 허은은 “그 전에 의병활동하면서 뜻 있는 사람들끼리 의기투합한 것” 이라고 전하고 있지만 의병 활동이 아니라 신학문 교육관계로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이상룡은 1909년 3월 대한협회 안동지회장에 취임했으며, 이상룡의 처남 김대락은 자신의 가옥을 출연하여 협동학교를 만들었다.

이회영은 1908년 블라디보스톡에 망명한 이상설을 만나 “지사들을 규합하여 국민교육을 장려할 것”을 결의했는데 교육 운동을 장려하는 과정에서 양자가 만나 의기투합했을 가능성이 크다. 독립운동 가문의 속사정에 정통한 허은 여사는 “(이상룡이) 이회영, 이시영 씨 형제분과 이동녕 씨와 의논해서 망명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고 거듭 전하고 있다.

허은 여사는 망명 과정에 대해 “우당 이회영 씨와 함께 미리 와 서간도에 자리 잡고 있던 유기호 씨, 하재우 씨 등이 며칠 뒤 왕산댁이 계시는 다황거우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이분들이 이민 오는 동포들의 대책반이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는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도착하면 “이동녕씨 매부 이선구(李宣九)씨가 마중 나와 처소(處所)로 간다”고 역시 조직적인 과정을 거친 집단 망명임을 설명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상룡 일가가 1911년 2월 7일 첫 번째로 정착한 곳이 유하현 횡도천(橫道川)이다.

이상룡은 당일 “오후에 김비서장(金賁西長)이 계신 곳을 찾아갔다” 라고 적고 있는데 김비서장은 이상룡의 처남 백하 김대락(金大洛)이다. 김대락은 그보다 이른 1911년 1월 15일 횡도천에 도착했다.

횡도천에는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양반 사대부들이 있었다. 정원하·홍승헌·이건승 같은 강화학파, 즉 조선의 양명학자들이었다. 횡도천이라는 만주의 작은 마을에 서울의 이회영 일가와 안동의 김대락·이상룡 일가, 그리고 충청도 진천과 강화도의 양명학자들이 모였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 없다. 이회영은 신민회원들과 함께 만주를 독립운동 근거지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사전 답사까지 다녀왔던 터였다.

횡도촌도 이 과정에서 이회영 일행이 물색한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 횡도천에 가장 먼저 망명한 양명학자는 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였다. 정원하는 강화도로 이주해 조선 양명학의 기틀을 놓은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의 7세 장손이다. 정원하의 가문도 소론이었는데 이회영 일가처럼 드물게 현달한 집안이었다. 정원하의 조부 정문승(鄭文升)은 고종 12년(1875) 종1품 숭정대부까지 올랐으며 부친 정기석(鄭箕錫)은 지평 현감, 안성 군수를 역임했다.

정기석은 충청도 진천에 터를 잡는데, 진천에는 역시 횡도천으로 망명했던 양명학자 홍승헌(洪承憲)의 조부 홍익주(洪翼周)가 진천현감을 역임하면서 별업(別業)을 일으켜 자손들이 진천에 정착할 터를 잡게 되었다.
홍승헌은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5대 종손인데, 홍익주와 정기석이 진천에 터를 잡음으로써 진천은 강화도와 함께 양명학의 주요한 근거지이자 소론 반향(班鄕)이 되었다. 역시 소론 가문이었던 이상설(李相卨)이 진천 출신인 것과 이건방의 문인 정인보가 한때 진천에 자리 잡은 이유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이 또한 이상설이 양명학을 접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강화도에서 망명한 이건승(李建昇)은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의 아우이자 병인양요 때 자결 순국한 이시원(李是遠) 형제의 손자였다. 이건승이 강화도의 고향집을 나선 것은 1910년 9월 24일. 9월 26일에는 강화 승천포에서 개경으로 올라가 홍문관 시강(侍講)을 역임한 원초(原初) 왕성순(王性淳)의 집에 유숙한다.

왕성순은 이듬해(1911) 중국 상해에서 황현의 유고 문집 󰡔매천집(梅泉集)󰡕을 간행하는 양명학자 창강 김택영(金澤榮)의 문인이므로 역시 양명학자였다. 왕성순의 집에서 홍승헌을 만난 이건승은 10월 3일 신의주에 도착했다가 12월 초 하루 중국인이 끄는 썰매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현 단동)에 도착했다. 안동현 구련성(九連城)에서 망명객으로서 첫 밤을 보낸 이건승과 홍승헌은 아침 일찍 북상길에 올라 12월 7일 횡도촌(橫道村)에 도착했다.

홍승헌과 정원하는 모두 고종 때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한 인물들이었다. 홍승헌은 홍문관 교리와 수찬을 역임했고, 이조참판까지 지냈으며, 정원하도 고종 19년(1882)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고 고종 23년(1886) 이조참의, 고종 30년(1893)에는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다.

유하현 횡도촌이라는 작은 마을에 서울의 우당 이회영 일가, 안동의 백하 김대락·석주 이상룡 일가, 충청도 진천의 홍승헌, 강화도의 이건승 등 전국 각지의 사대부 출신 양명학자들이 집결했다. 횡도천이라는 작은 마을에 우리 역사에서 드문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현된 것이다. 민영규 교수는 “이건승·홍문원(홍승헌)·정기당(정원하) 일행과 이회영 일곱 가족과는 얼기설기 세교가 얽혀 있는 가족들” 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런 세교는 소론이라는 당파적 동일성과 양명학이라는 학문적 동질성이 바탕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09년 봄에 비밀 결사조직인 신민회에서 해외에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군관학교설치’를 결의하는데, 이런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론에도 양명학의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정규는 1908년에 이회영과 이상설이 이미 ‘만주에다 광복군 양성 훈련의 기지를 만들 것’에 대해 결의했다고 전하면서 상동 기독교회가 신민회의 비밀기지가 되어 이회영·전덕기·이동녕·양기탁 등이 조석으로 밀의를 거듭했다고 기록했다.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론은 해외에 이런 기지를 꾸릴 인적·물적 자원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망국에 즈음해 전국 각지에서 망명한 양반 사대부들이 공통적으로 양명학적 소양을 갖고 있는 것은 간과해서 좋을 부분이 아닐 것이다.

5. 양명학과 아나키즘

양명학은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1471~1528)이 명대 집대성한 유학의 새 조류이다. 주희(朱熹)가 심(心)과 리(理)를 둘로 나누어 인식한데 비해 양명학은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1139~1192)의 심즉리(心卽理)설을 계승해 심과 리를 하나로 보았다는 점이 다르다. 양명학이 조선에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었지만 근래에는 중종 16년(1521) 왕양명의 󰡔전습록(傳習錄)󰡕이 조선에 전해졌다고 보고 있다.

왕양명은 주희가 심(心)과 리(理)를 둘로 나눈 것에 대해 “주자의 이른바 격물이라는 것은 사물에 나아가(卽物) 그 이치(理)를 궁구하는데 있다.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사사(事事) 물물(物物)마다 그 이른바 일정한 이치(定理)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마음으로써 사사물물 가운데 이치를 구하는 것이니 심(心)과 리(理)를 둘로 나눈 것이다.” 라고 비판했다.

왕양명은 “무릇 사사물물에서 그 이치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그 어버이에게서 효도의 이치를 구하는 것과 같다. 그 어버이에게서 효도의 이치를 구한다면 효도의 이치는 내 마음에 있는 것인가, 도리어 그 어버이의 몸에 있는 것인가? 가령 과연 어버이의 몸에 있다고 한다면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는 내 마음에는 효도의 이치가 없다는 것인가?” 라면서 “마음이 곧 리(理)이다. 천하에 마음 밖의 일이 있고 마음 밖의 리(理)가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왕양명은 심의 본체가 천리(天理)인데, 양지(良知)란 바로 마음의 본체이자 내적 천리이며, 인심에 선천적으로 부여된 지(知)라고 보았다. 그래서 양지(良知)는 경험을 통해 획득된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부여된 것으로 보았다. 양명학이 성리학과 다른 점은 인간의 선천적 차별을 부인한다는 점이다. 왕양명은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은 우부(愚夫), 우부(愚婦)와 성인(聖人)이 같다” 라고 주장했다.

 바로 이 대목이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양명학을 이단으로 몬 주요 이유였다. 성리학은 사대부의 계급적 우월을 절대시하는 이념체계인 반면 양명학은 이런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사상체계였다. 양명학의 이런 세계관은 천지만물(天地萬物)을 하나로 보는 대동사회 건설로 이어질 수 있다.

“무릇 성인(聖人)의 마음은 천지만물을 일체로 삼으니 천하 사람에 대해 안과 밖, 가깝고 먼 것이 없고 무릇 혈기 있는 것은 모두 형제나 자식으로 여기어 그들을 안전하게 하고 가르치고 부양하여 만물일체의 생각을 이루고자 한다.”

양명학은 사대부의 계급적 이익을 절대시하는 성리학과 달랐다. 명종 13년(1558) 유성룡은 󰡔양명집(陽明集)󰡕을 “당시에는 아직 왕양명(王陽明)의 글은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라고 말했는데, 그는 비록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한 이황의 제자였기에 양명학자가 아닌 것처럼 처신했지만 그가 임란 때 추진한 면천법(免賤法), 작미법(作米法), 속오군(束伍軍), 중강개시(中江開市) 등의 정책들은 모두 양명학의 견지에서 바라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명(明)의 이탁오(李卓吾:1527~1602)가 “사람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고 하면 옳지만 식견에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 어찌 옳겠습니까?” 라고 말한 것처럼 남녀차별도 거부했다. 양명학의 대동사회론은 아나키즘에서 그리는 이상사회론과 비슷하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에 대해 “인간사회의 각 단위에 대하여 최대량의 행복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유, 평등, 우애로 향하여 나가는 인류의 걸음을 예지(豫知)하려는 기국(企國)이다” 라고 정의했다.

자유, 평등, 우애가 실현되는 대동의 사회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 아나키즘이란 뜻이다. 김종진은 운남(云南)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만주로 가던 도중 이회영을 방문했다. 이때 이회영은 김종진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자유 평등의 사회적 원리에 따라서 국가와 민족 간에 민족자결의 원칙이 섰으면 그 원칙 아래서 독립된 민족 자체의 내부에서도 이 자유평등의 원칙이 그대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니까 국민상호간에도 일체의 불평등, 부자유의 관계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한 나라의 각 개인은 자유롭고 평등해야 하고, 이런 개인들이 모여 조직한 각 국가와 민족도 서로 평등한 관계 위에서 민족 자결의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회영과 김종진은 토론에서 “결론으로서 무정부주의의 궁극의 목적은 대동의 세계, 즉 하나의 세계를 이상하는 것” 이라고 규정지었다.

대동의 세계란 “각 민족 및 공동생활 관계를 가지는 지역적으로 독립된 사회군(社會群:국가군)이 한 자유연합적 세계 연합으로 일원화” 되는 사회를 뜻한다. 즉 “각 민족적 단위의 독립된 사회나 지역적인 공동생활권으로 독립된 단위사회가 완전히 독립된 주권을 가지고 자체 내부의 독자적인 문제나 사건은 독자적으로 해결하고 타와 관계된 것이나 공동적인 것은 연합적인 세계기구에서 토의결정” 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동(大同)은 서양에서 온 사상이 아니라 고대 동양의 전통 사상이었다. 조선의 율곡 이이를 비롯해 여러 정치가들도 대동사회에 대해서 역설했다. 동양전통의 대동사회는 “자․타의 구별을 넘어선 보편적 인류애”가 넘치는 사회이자 소외된 계급과 계층[矜寡孤獨廢疾者]이 없는 사회를 뜻한다.

제(濟)나라 공양고(公羊高)가 춘추(春秋) 공양전(公羊傳)을 지으면서, 춘추를 난세(亂世)·소강(小康)·대동(大同)으로 나누어 해설한 삼세지학(三世之學)도 대동사회를 이상사회로 보고 있다. “대도(大道)가 행해질 때는 천하가 공공의 것이었다〔大道之行天下爲公〕” 는 대동사상은 동양 유교사회의 모든 개혁적 정치가들이 공통으로 주창했던 이상사회의 모습이었다. 󰡔예기(禮記)󰡕「예운(禮運)」편은 대동사회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대도(大道)가 행해질 때는 천하가 공공의 것이었다. 어질고 능력있는 사람을 발탁해서 신의를 가르치게 하고 화목을 닦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어버이만 어버이로 여기거나 자신의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은 편안히 인생을 마칠 수 있었고 젊은이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어린이는 잘 자랄 수 있었다. 과부·고아·홀아비·병자를 다 부양했으며 남자는 직업이 있고 여자는 시집갈 곳이 있었다. 재물이 낭비되는 것은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신이 소유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해 일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음모가 생기지 못했고 도둑질도 일어나지 않고 난리도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바깥문을 잠그지도 않았는데 이를 일러 ‘대동’이라고 한다.”

이 대동의 동(同)에 대해 주석은 “동은 화해(和)와 평등(平)과 같다.” 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회영의 대동사상은 모든 개체의 독립과 자유, 평등의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각 개인 사이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각 개인이 소속되는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갖는다. 왕양명의 천지만물일체론은 이회영의 대동사회론과 유사하다.

이회영은 젊은 시절 이상설 등과 함께 수학하면서 양명학의 대동사회에 대한 공부를 했음에 틀림없다. 그가 “무정부주의의 궁극의 목적은 대동의 세계” 라고 규정지은 것은 대동사회를 몰랐다면 나오기 어려운 표현이다. 왕양명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 양지(良知)를 깨닫게 하고 그것으로써 서로 편안하게 해 주고 서로 도와주며 사리사욕의 폐단을 제거하고 시기, 질투하는 습성을 일소하여 마침내 ‘대동(大同)’의 실현”이라고 말한 것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相互扶助論)을 설명한 듯하다.

이회영이 ‘약관(弱冠)이 지나면서부터 스스로 솔선하여 불평등한 봉건적 인습과 계급적 구속을 타파’ 하려 했다는 말은 단순히 이회영의 인간적 성향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양명학 학습의 결과일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성리학은 사대부 계급의 우월을 선천의 것으로 규정짓지만 왕양명은 “옛날 사민(四民)은 직업은 달랐지만 도는 같이 했으니〔異業而同道〕, 그것은 마음을 다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선비는 마음을 다해 정치를 했고 농부는 먹을 것을 갖추었고, 공인(工人)은 기구를 편리하게 하였으며, 상인은 재화를 유통시켰다.”
라고 신분의 우월을 인정하지 않았다.

왕양명은 또, “각자 타고난 자질에 가깝고, 힘쓰면 미칠 수 있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그 마음을 다하기를 구했다. 이들은 생인지도(生人之道)에 유익함이 있기를 바라는 점에서 하나일 뿐” 이라고 직업이 타고난 신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이서(吏胥)와 노비에 대한 차별적인 언사부터 평등한 경어(敬語)로 개(改)하려 노력하였으며 적서(嫡庶)의 차별을 폐하고 개가·재혼을 장려 단행” 했다는 것도 양명학 학습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이회영이 양명학을 사상으로 깊이 받아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양명학 이론에 대해서 공부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양명학이 이회영이 속했던 소론 가문의 전습(傳習)사상이었다는 점, 양명학을 공부한 이상설과 함께 공부했으며 평생지기였다는 점, 강화학파들과 사전 계획 끝에 만주 유하현 횡도촌으로 동시에 망명했다는 점 등이 이를 말해준다. 이회영은 아나키즘 이론이 양명학의 대동사회론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점을 인지하고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이회영이 김종진에게 ‘覺今是而昨非’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6. 순국

이회영은 그간 대련수상경찰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932년 11월 22일 󰡔동아일보󰡕는 “이회영씨는 상해를 떠나 모 방면으로 여행하다가 대련경찰서에 인치되어 취조 중에 별세했다는 부고가 장춘에 있는 씨의 친녀 이경숙씨에게 속달되었다”면서 장춘의 이경숙은 부고를 접하고 18일 밤 장춘발 열차로 대련으로 향했다 한다고 전하고 있다.

같은 신문은 이틀 후 “17일 오전 5시 20분 유치장에서 ‘삼로끈’으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한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공개된 중국측의 기록에는 이회영의 순국지가 대련 수상경찰서가 아니라 여순감옥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이회영이 일본군이 점령한 만주로 간 이유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장홍(張泓) 주편(主編)의 󰡔동북항일의용군(東北抗日義勇軍)-요녕권(遼寧卷󰡕은 당시 동북민중항일구국회(東北民衆抗日救國會) 에서 상위(常委) 총무조장을 맡고 있던 중국인 노광적이 상해에 도착하자 이회영이 찾아와 한중연합 투쟁을 제의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회영은 “나는 전에 통화(通化)에 산 적이 있는데 일본이 동북을 침략했으니 중국인과 한국인은 연합해서 항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무장부대를 조직하거나 일본 천황 등을 암살하는 활동 등을 하겠다고 제의했다는 것이다.

이회영은 장학량(張學良) 면담을 요청했는데 장학량을 직접 만났다는 기록은 없지만 노광적은 동북민중항일구국회(東北民衆抗日救國會)의 팽진국(彭振國)과 동북난민구제회(東北難民救濟會) 이사장 주경란(朱慶瀾) 장군을 만날 수 있게 주선했다고 전한다.

이회영은 장학량의 수하였으며 요녕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 총사령이었던 당취오(唐聚五)와 연결되었고, 의용군 3군단 지휘부와도 연결되어 구체적 임무를 띄고 만주로 파견되었다고 전한다. 󰡔동북항일의용군(東北抗日義勇軍)󰡕은 “이회영은 해로를 거쳐 동북으로 갔으나 단 불행하게도 일본 대련 수상경찰국에 체포가 되어 여순감옥에서 적들에게 살해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회영의 순국 장소가 대련수상경찰서가 아니라 여순 감옥이라는 것이다. 이 기사는 이회영을 직접 만났던 사람의 회고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다. 또 ‘동북의용군 사령부(東北義勇軍司令部)’ 명의의 문건도 이회영의 순국지를 여순감옥이라고 전해주고 있다. 이 기록은 동북의용군 측에서 이회영을 맞으러 나갔던 사람들이 ‘중화민국(中華民國) 21년 11월 22일(1932년 11월 22일)에 의용군 사령부에 보고한 당대의 기록이다.

이 문건은 당시 북평에 있던 동북민중항일총지휘부에서 동북의용군사령부에 이회영의 파견 사실을 통보했고, 의용군 측에서는 김효삼(金孝三)·김소묵(金小黙)·양정봉(梁貞鳳)·문화준(文華俊) 네 명을 대련으로 파견해 이회영을 맞이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회영은 11월 13일 대련수상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1월 17일 여순감옥에서 교형(絞刑:사망)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의용군 측에서는 자신들의 감옥 내 조직망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아낸 후 김효삼(金孝三)이 신경(新京)에 있던 이회영의 딸 이규숙에게 통보했다고 전한다.

이은숙 여사의 자서전은 일본영사관에서 통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일본영사관에서 장기준과 이규숙 부부의 거처를 알았으면 그냥 두었을 리 없다는 사실로 봐서 이 문건의 신빙성이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67세 노인 이회영은 혹독한 고문에도 끝내 함구하다가 여순 감옥에서 고문사 당했던 것이다. 이회영의 아들 규창은 자서전에서 “(이규숙이) 안면을 확인할 때 선혈이 낭자하였고 따파오에도 선혈이 많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면서 역시 일제에 의한 고문사임을 전하고 있다.

7. 나가는 글

우당 이회영은 유교(儒敎) 가문에서 태어난 양반 출신이지만 기득권을 버리고 신사조를 받아들였다. 서세동점(西勢東漸)하는 격동의 국제정세 속에서 과거의 유교 사상에 매몰되거나 양반 사대부의 기득권에 연연해서는 국권을 지킬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우당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방식으로 무장독립투쟁을 가장 앞세웠다. 일제의 압도적 무력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자 두 가지 노선이 존재했는데 하나는 무장투쟁으로 일제를 구축하자는 독립전쟁론이고, 다른 하나는 외교적 방법을 통해 나라를 되찾자는 외교독립론이었다. 두 노선 중에서 우당 이회영은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전쟁론을 선호했다. 독립전쟁론은 비타협적 무장투쟁 노선으로서 일제로부터 가장 강력한 탄압을 받은 운동 노선이었다.

우당은 동양평화와 세계평화에 대한 확고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일본도 표면적으로는 동양평화를 주장했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달랐다. 일본은 자신들이 한국, 중국 등을 강점한 후 서양에 맞서는 것을 동양평화라고 주장했지만 우당은 모든 민족이 독립된 상태에서 주권을 가지고 서로 평등하게 지내는 것이 동양평화라고 생각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무력으로 억압한 상태에서 평화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일제의 주장은 궤변에 불과하다.

우당 이회영은 모든 개인, 국가, 민족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지내는 것이 진정한 평화 상태라는 평화사상을 갖고 있었다. 우당은 일제에 의해 침략 당하고 있는 중국의 처지를 깊이 동정했다. 여순감옥에서 옥사한 우당은 중국인들을 일제의 침략에 함께 고통을 받는 같은 피압박 민으로 생각했다. 같은 피압박 민족이란 동질성을 가지고 압제에 저항하는 정신으로 중국과 중국인들을 바라본 것이다. 이런 선열의 정신이 현재도 구현된다면 한중일 사이의 진정한 평화체제가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