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에 걸쳐 완성한 대장경이다. 민족의 힘을 모아 외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만들었는데, 경판(經板)의 수가 8만 1258판에 이른다.

수많은 외적의 침입과 위험속에서도 꾸준히 지켜져 내려온, '우리나라를 지켜온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해인사 입구 앞에 서있는 비석

 일본의 끈질긴 요구  
 
일본 사신 두 사람이 경판을 구하려다가 얻지 못하게 되자, 음식을 끊고 말하기를, “우리는 오로지 대장경판을 구하러 왔다. 일본을 떠날 때에 경판을 가져오지 못할 바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반드시 말대로 실천하지 못한 죄를 받을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먹지 않고 죽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 세종 23권 6년 1월 2일조

조선왕조실록에서 볼 수 있는 이 글은 일본이 얼마나 끈질기게 우리나라에 대장경을 요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일본은 고려 말 이후로 계속해서 우리나라의 대장경을 인쇄해달라 요구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대장경판을 약탈하려 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이어진 역사적 위기  
 
이처럼 팔만대장경은 완성된 이래 7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내우외환이 끊임없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고스란히 우리 앞에 그 성스러움을 내보이고 있다. 민족의 역사 속에서 수난을 함께 겪어온 대장경판은 멀리는 경판 불사가 끝난 후 고려말기와 조선조 초기의 왜구침입, 조선중기의 임진왜란, 가까이는 6ㆍ25전쟁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순간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단 한 장의 분실도 없이 고스란히 보존된 것은 그러한 역사적 위기를 잘 넘겼기 때문이다.

최적의 온도와 습도로 보관되어 온 팔만대장경

  6ㆍ25전쟁 때 맞이한 위기의 순간 
 
그 중 동족상잔의 비극, 6ㆍ25전쟁 때 맞이한 위기의 순간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인민군들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가야산에 숨자 미군 사령부는 해인사에 공중 폭격을 단행하는 작전을 편다.
하지만 당시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알고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 상공에서 기수를 돌려 선회하면서 편대기들에게 폭격 중지를 명령했다. 명령불복종의 경위를 추궁하는 자리에서 김영환 대령은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총본산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고 있으면서 차라리 인도를 잃을지언정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한 점 등을 들며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없었다고 말했다.

 

 어제 만든 듯 그대로 보존되어 온 신비로움 
 
 “천 년이 지났어도 판이 새로 새긴 듯하고, 나는 새들도 이 집을 피해 기와지붕에 앉지 않으니, 실로 이상한 일이다.”
지리학자 이중환은 대장경판과 장경판전을 『 택리지 』에서 위와 같이 묘사하였다. 이처럼 팔만대장경은 완성된 뒤 현대에 이르기까지 750여 년이라는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전란과 화재를 맞았음에도, 그 대규모의 전질 모두가 마치 어제 만든 것처럼 깨끗하게 보관되어 있으니 실로 신비롭고 감동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