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윤열수 / 가회민화박물관장

 

민화와 부적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라 할 정도로 민중들의 삶이 배어 있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정초가 되면 관가 민가를 가리지 않고 민화가 나붙었다. 민화의 소재로 우리나라 선조가 가장 선호하는 수호신은 단연 호랑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때 고분벽화에 사신도 중 백호를 나는 호랑이(飛虎:비호)로 묘사했듯 사악한 기운을 막고 잡귀 쫓는 신령한 영물을 현실에서 흰 호랑이로 본 것이다.

그 믿음은 시대를 이어오며 1821년까지도 갈기나 날개 달린 모습으로 민화에 남았다. 호랑이는 가죽 발톱 수염 살 뼈 등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실생활도구와 약재, 의료도구로 만들어져 쓰였다. 실제로 부스럼이 났을 때 호랑이 수염으로 찔러 고름을 빼면 절대 탈 나는 법이 없고 관절에는 뼈를, 학질은 털을 태워 마시면 질병이 도망가며, 술을 끊는 데는 호랑이 변을 약으로 썼다.

호피로 된 병풍 방석 깔개 외에도 호피문양의 가마씌우개로 현모양처를 맞으려 했다. 호랑이 발톱을 다듬어 만든 노리개 금난장을 차서 남편의 바람기를 잠재우고 당상관 부관들은 호랑이 수염으로 만든 머리꽂이로 재난방지를 염원했다. 이렇듯 호랑이의 모든 것이 철저하게 ‘지켜준다’는 강한 믿음은 ‘虎(호)’란 글자만으로도 같은 효과를 기대하며 오복을 불러들이는 ‘龍(용)’자와 함께 대문에 붙였다.

시대에 따라 민화의 표현은 다르지만 드러나는 민중의 마음은 한결같이 신령스럽고 다정다감하게 웃는 모습이다. 사람과 함께 노닐고 참새 등 작은 짐승들과도 친한 호랑이, 바보스러울 만큼 순한 부드러움과 귀여운 미소, 무서움이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혀가 뒤집어질 정도로 웃는 모습이다.

이런 민화의 근원은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도록 웃는 신라의 귀면와와 일맥상통한다. 귀면와는 치우천왕과 관계가 깊다. 치우의 상징핵심은 지켜주고 막아주는 방패막이다. 그 의식은 수 천 년을 뿌리 깊게 이어오며 민간신앙으로 발전해 왔다.

동네 어귀마다 서있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장승문화로, 가면과 탈춤의 춤 문화로, 집집마다 붙이는 그림문화로 이어졌으며 아기 돌 때 입히는 옷의 문양으로도 이어졌다. 또한 이야기로 전승된 치우의 불가사의한 무용담은 독특한 ‘불가사리’라는 괴물도 탄생시키며 민화로까지 남아있다. 이러한 정서는 호랑이 사자 도깨비 등 온갖 동물들 심지어, 초목과 벌레까지도 그 상징성을 되살려 실생활과 민화예술로 부각되었다.

어둠을 밝히는 장닭, 해와 달이 뽕나무밭에서 뜨는 천하도(天下圖), 잎이 가장 큰 오동나무는 하늘을 덮고 대나무는 속이 비었다 해서 상제의 지팡이로 상징되었다.  닭과 닭 벼슬을 닮은 맨드라미는 승승장구 벼슬길 기원으로 그려졌다, 귀신은 워낭소리를 가장 싫어해서 귀신 쫓는 방울에는 항상 도깨비가 그려져 있다. 풀만 먹는 온순한 발굽동물도 신성시해서 외 뿔로 묘사해 신선처럼 여겼고 하찮은 미물 벌(蜂)과 천둥번개신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모두가 웃는 형상이다.

실제로 사자나 호랑이는 동물세계에서 제왕 격으로 사나운 존재다. 하지만 민화 속의 호랑이는 천연덕스럽고 곰살궂다. 너무 우스워서 이를 악물고 웃는 듯한 사자나 포복절도가 연상되는 호랑이 등 동물이 웃는 문화는 세계 어느 민족도 지니지 못한, 우리문화에만 존재하는 정서다. 이는 천성적으로 웃는 문화를 지닌 우리 민족만의 전통적인 근본바탕이 삶 속에 어우러져 발현된 지혜의 표현이다.

그러나 1940년대엔 우리의 정신적 지주인 산신령이 일본순사로 둔갑하고 술 취한 호랑이, 사찰벽화 십우도의 말 탄 일본순사, 귀신 잡는 감로탱화 등이 그려졌듯 다정하고 친근한 호랑이, 익살스럽고 장난꾸러기지만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도깨비가 사람 잡아 먹는 호랑이, 귀신 잡아먹는 도깨비로 남았다. 일본강점기 그들이 우리 정신을 뒤흔들어 왜곡시킨 결과이다.

조상의 정신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민화와 부적, 전통문화의 꽃, 세계인이 그토록 한국문화에 감탄사를 연발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 아름다움과 예술성을 잘 모르고 인식조차 못 하고 있다. 물론 초·중등 과정 교과서에 민화가 수록되어 있지만 대부분 그 가치를 모르고 관심조차 두지 않는 현실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일본과 미국 박물관 곳곳에 우리 문화재가 수두룩하게 있으니 역사가와 민화가 함께 연구해서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우리 문화를 정립시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 민화가 지닌 충분한 가치를 사료로서 인정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