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통문화를 통해 이어온 삼원사상. 그 삼원사상의 핵심은 '홍익인간 이화세계’이다. 이 철학은 여러 가지 문화를 통해 이어지고 전파되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삼원 사상에서 이원 사상으로, 이원에서 다시 삼원으로 변모해 왔다.

어째서 삼원에서 이원으로 변모해 가는가?
조화로움이 깨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먹고사는 문제에서 출발한다. 먹고 살지도 못하는데 조화로움이 무슨 소용인가? 도를 닦는 사람이면 몰라도 보통의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가 최우선이기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조화가 깨지는 것이다.

안전의 욕구, 소유의 욕구, 지배의 욕구. 이것이 조화로움을 깨는 문제이다. 이것을 뛰어넘은 사람을 우리는 '도인'이며 '성인'이라고 이야기해 왔다. 사실 이 욕구는 참 넘기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 문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부분이 이 세 가지의 욕구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먹어야 살고, 입고, 가져야 산다. 또, 어떠한 조직을 유지하려면 지배의 구조가 생성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리고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이 욕구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가지고, 입고, 성취하는 것에 대해 누구도 무어라 하지 않는다. 그것이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치면, 조화로움이 깨진다. 분수껏 챙겨야 하는데 남의 몫까지 더 챙기려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눈감아 줄 수 있지만, 그것이 과하면 주변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준다. 욕심을 조금 놓아야 하는데, 참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욕심이 지나친 사람들에게는 충격요법으로 그것을 억제한다. 법이나 관습 등의 예법으로 규칙을 정해 통제하는 것이다. 이런 강제적 방법은 물론 좋은 점도 있지만, 지키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적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통제하지 않아도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알아서 조절한다. 이런 양심이 살아 있는 사회, 그 사회가 바로 이상적인 홍익인간 이화세계이다. 그렇다면 양심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부작용없이 사람들이 욕심을 내려놓고 양심을 키우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풍류'다.

'풍류'를 하면 사람의 양심이 밝아진다. '풍류' 속에는 조화로운 신명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명을 그저 신나게 잘 노는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진정한 신명은 그 사람의 영적인 부분까지 끌어올려주는 힘이 있다. 

 

 물론 사람들끼리 잘 노는 것만으로는 양심이 크게 밝아지지 않는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함께 어우를 수 있을 때 즉, 천지기운과 합일된 신명일 때 마음이 태양처럼 밝아지는 것이다. 천지인 조화의 신명의 극치가 바로 풍류도가 되는 것이다. '나'라는 생각을 놓을 때 하늘이 다가오고, 땅이 다가온다. 가짜의 '나'를 내려놓게 하는 무기가 바로 춤과 노래와 악기다. 자연스럽게 풍류를 어울릴수 있게하는 멋진 도구다. 그래서 풍류를 하면 사람들이 자연스러워진다.

결국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움을 찾게 해준다면 양심은 밝아질 것이고 가정과 이웃과 민족과 인류의 양심 또한 밝아질 것이다.

필자는 양심이 살아 있는 사회를 꿈꾼다. 남들이 죽기 살기로 일하자고 외치는 사회에서 필자는 '놀기도 하면서 살아가세'라고 외친다. 아직은 메아리가 들려오지 않지만, 조만간 메아리가 들려올 것으로 확신한다. 그 메아리가 내 귀에 들리는 날, 나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각설이 타령을 외치리라.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잃어버린 양심이 이제사 돌아왔네.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만화방창 호시절에 아니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