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상고문화의 원류인 환국-배달국-단군조선의 ‘천손 문화’를 이끌어갔던 실질적 종주宗主는 역대의 환인-환웅-단군이다. 이들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본질인 ‘천·지·인 삼원(천부)’의 진실을 온전히 지켜나갔던 ‘천부의 전승자인 스승이자 군왕’이었다.

대체로 환국의 역대 환인들은 사람들이 처한 열악한 물질적 조건을 우선 개선해 천손 문화의 문명적 기초를 닦았다. (조화造化·부도父道) 이어 배달국의 역대 환웅들은 스승과 군왕의 두 가지 역할 중에서 상대적으로 스승의 역할에 주력해 천손 문화의 수행적 본질을 널리 알려갔다. (교화敎化·사도師道) 단군조선의 역대 단군들은 상대적으로 군왕의 역할에 치중하여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함으로써 천손 문화의 정치·사회적 제도화를 이루어내었다. (치화治化·군도君道)

배달국시기 말에는 ‘교화·사도’에서 ‘치화·군도’로 나아가는 천손 문화의 일대 전환기로 당대의 환웅들에게는 문명 진화의 과정에서 더욱 심각해져 가는 갈등 조정을 위한 강력한 통치력이 요구되었다. 지금까지도 사람의 입에 회자되는 치우천왕의 전설적인 중원 경략은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배달국 개창 이래 천손 문화의 수혜를 받아왔던 중원지역에서 배달국 후반기, 천손 문화의 본령인 ‘조화’가 아닌 ‘힘의 논리’에 따른 패권 쟁탈 양상이 나타났다. 급기야 이는 배달국의 천손 문화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천자국 질서를 구축하려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치화·군도’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였던 치우천왕은 중원 경략이라는 놀라운 선택을 하여 정확하게 목적을 달성하였다. 중원지역 천손 문화권을 안정시켰으며 ‘치화·군도’로의 방향 전환을 이루어내었다. 치우천왕은 환국 이래 이어졌던 ‘천부의 전승자인 스승이자 군왕’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지만 ‘교화·사도’에서 ‘치화·군도’로 천손 문화의 일대 전환을 이루어낸 공로로 인해 길이 존숭되었다. 

사람들은 치우천왕의 밝음과 강함, 곧 정확한 선택과 강력한 실천을 바라보면서 “천손 문화란 무기력하고 모호한 방임적 평화가 아니라 사람의 본질인 ‘천·지·인 삼원(천부)’의 진실, 곧 ‘조화’를 현실 속에서 지키고 이루어내기 위한 적극적인 평화”라는 깊은 자각을 하게 되었다.

천손 문화가 유지되었던 단군조선시대까지는 ‘천부의 전승자인 스승이자 군왕’로서의 치우천왕의 진면모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단군조선을 마지막으로 천손 문화가 단절되면서 치우천왕의 진면모는 잊혀지게 되었다.

특히 중원인들은 호된 경험을 통해 치우천왕의 진면모보다는 ‘두려움’의 이미지를 더 강하게 새겼다. 따라서 천손 문화에 대한 인식의 약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치우천왕은 ‘군신軍神’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중국통일이 이루어지고 전제왕권이 확립되는 진·한대에 ‘군신’에 대한 국가적인 수요가 높아지면서 군신 치우에 대한 제례가 정례화되었다.

백성들은 매년 10월 산동성 동평군 소재 치우 묘에 제사하였는데 이때 붉은 비단 형상의 기운이 뻗쳐 이를 ‘치우기蚩尤旗’로 불렀다. 치우천왕이 ‘붉은 치우기’ 이미지로 형상화되면서 치우천왕은 ‘독신(纛神, 꿩의 꽁지로 장식한 큰 깃발의 신)’이 되기도 하였다.

중국의 역대 왕조례에서 ‘독신’은 군신으로 널리 숭상되었다. 또한 ‘치우기’는 별자리 이름이 되었는데, 이 별이 나타나면 전쟁이 일어난다고 한다. 치우의 군신이미지는 군사훈련에도 활용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소뿔을 쓰고 맞겨루는 ‘치우전戰(또는 치우희)’ 또는 ‘각저전角抵戰(또는 각저희)’로 후대에 씨름이 되었다.  또한 군신의 이미지는 ‘벽사(보호하고 사악한 것을 막아내는 것)’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기에 치우천왕은 벽사 용도의 도안이나 부적(치우천왕의 기념일인 단오절에 사용된 적령부赤靈符), 분묘나 사당의 화상석畵像石 등으로도 널리 활용되었다.

치우천왕에 대한 중원인들의 군신이미지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사회로 수입되었다. 배달국의 천손 문화는 단군조선으로 승계되었으나 단군조선을 끝으로 그 원형을 상실하게 되었고 대신 중국 삼교(도교·불교·유교)의 영향력이 점차로 높아져 갔다.

한국 선도나 천손 문화의 본질은 점차 잊혀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치우에 대한 이미지도 중원인들의 이미지를 그대로 수용하게 된 것이다. ‘천부의 전승자인 스승이자 군왕’에서 ‘군신 또는 도깨비(鬼)’의 이미지로 바뀌면서 치우천왕의 진면모는 서서히 잊혀져갔다.

역대 왕조 이래 군대의 무기나 깃발, 궁실의 기와나 장식물 등에 남은 ‘도깨비문(귀문鬼文)’은 벽사의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원전 2,600년경 치우천왕이 그러하였듯이 천손 문화의 본질이란 천손 문화가 지켜질 때에야 제대로 알 수도 전달될 수도 있다.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