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말. 스승님. 우리말에서 ‘ㅅ’은 ‘쑥쑥 솟다’처럼, 성장과 높음을 의미한다. 사법부, 사정 기관 등은 권력기관이며 솟을 문은 치켜 올라간 문이며 솟대는 하늘로 향한 염원의 상징이다.

그 솟음의 기운을 위에서 ‘ㅡ’ 로 가로 막으면 ‘시옷’이 ‘지읒’이 되어 솟구치다가도 졸려서 주저앉게 된다. 들떠 솟아나던 감정도 자작자작 잦아들어 자장자장 잠들게 된다. 그러므로 스승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높은 분이고 늘 깨어서 환한 님이시다. 누구나 스승이 있고, 스승이 된다는 것은 쉼 없이 흐르는 삶의 강에서 대나무의 마디 처럼 정확한 시기에 올바른 가르침을 받는 것으로 기적과 같은 행운인 것이다.

어미 닭은 병아리의 탄생을 가르치니 병아리는 밖을 향해 껍질을 쪼고, 어미는 안쪽으로 같은 곳을 동시에 깨어주니 동시동탁(同時同琢)이다. 어미가 일찍 쪼아 미리 구멍이 나면 병아리는 말라 죽고, 잠시라도 늦게 깨어 주면 질식하므로 어미와 새끼는 생사를 걸고 바로 그 순간 그곳에 집중하는 것이다. 절묘한 시차로 새끼를 살려 내고, 먹이고, 수 없는 생존술을 몸으로 익혀 살아갈 능력을 몸에 체득시키는 것, 곧 ‘가르침’이다. ‘갈다磨’와 ‘치다育’의 합성어 ‘가르치다’는 단순한 방향 ‘가리킴’의 정보 전달이 아니다. 생명의 탄생과 지속적인 살림으로서의 ‘가르침’은 무섭게 엄정한 삶 자체이다.

스승 또한 비인부전(非人不傳,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마라)처럼 제자를 가르치되 단호한 기준이 있었다. 다물(多勿)을 국시로 고조선의 정신과 땅을 ‘다물’려 받으려 했던 고구려에는 애국가라고 할 수 있는 다물흥방가(多勿興邦歌)가 있었다. 을밀대를 세운 을밀(乙密) 선인(仙人)이 지어 국민들이 아침저녁으로 부르게 하니, 그는 재상 을소(乙素), 재상 을파소(乙巴素)의 후손이자,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선조이다.

“지나간 것은 법이 되고 뒤에 오는 것은 위가 된다. 법은 나지도 죽지도 않고 위는 귀함도 천함도 없도다. (중략…) 참 천명의 큼이여, 성품을 낳아 광명에 통하네.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서면 충성함이라. 광명은 그래서 모든 선을 행하지 않음이 없고, 효와 충은 그래서 모든 악은 일체 짓지 않나니. 백성의 옳은 바는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나라 없이 나라는 건 어떻게 생겼을 것인가. 나라가 소중하기 때문에 백성은 사물이 있어 복을 누리고,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엔 혼이 있어 덕을 누린다네.

태백의 가르침은 우리의 스승일세. 우리들 자손들은 그래서 더 평등하고, 우리들의 스승은 그래서 가르침마다 새로워라. 나라가 신구(新舊)의 조화로 발전 해가며 ‘효(孝)와 충(忠)과 도(道)’가 스승의 법이 되어 누구나 평등하고 나날이 새로움이라고 온 백성이 노래한다. 태백족의 스승은 ‘나지도 죽지도 않는 법’을 가르치니 인간의 삶을 가장 가치 있게 하는 천부지모(天父地母)의 법맥이다.

누구나 하늘아버지, 땅 어머니로부터 태어나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의 가르침은 한인, 한웅, 단군 스승으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통하여 이어져 내려 왔다. 개인과 전체의 생명을 걸고 이어져온 ‘스승과 제자’라는 깨우침 문화는 어쩌면 인류보편의 최고가치가 아닐까?

그 정신과 에너지를 다물(多勿)려 받아 고구려, 발해의 국혼이 되고 마침내 대한민국을 열었고, 우리는 헌법으로 또다시 스승의 가르침을 폈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선조 스승들의 가르침은 가면 지워지고 오면 변하는 단순 정보가 아니라, 피를 통하여 이 어져 온 불생불멸의 생명 실현이었건만, 오늘 우리는 그런 스승을 제대로 모시고 있는지 자문 해 볼일이다. “내 가슴엔 아직도 스승님이 살아 계시는가?”

글, 그림 원암 장영주 | (사)국학원 원장(대) 및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 이 칼럼은 [충남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