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역사 중 국체 존망의 가장 극적인 상황을 꼽으라면 단연 1597년의 울돌목전투일 것이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해일처럼 쳐들어오는 300여척의 왜 수군을 패퇴시키지 못하였더라면 조선은 영원히 사라졌을 터,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기백과 혼은 일본인들의 표현대로 완벽한 군신(軍神)이지만, 그 분의 세상에서의 삶은 역사상 가장 가난하고 불우한 장군이었다. 장군은 1545년 4월 28일, 양반의 후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났고 충남 아산의 외가에서 성장했다. 문관의 뜻을 접고 무관의 꿈을 품고 노력했으나 등용은 동년배보다 훨씬 늦었고, 과거도 겨우 턱걸이로 합격 할 정도였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죽음 앞에 늘 앞장서는 장군으로 일상적인 모진 고통도 감내하시면서 성인의 길을 동시에 절차탁마하시어 결국 성웅으로 불리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에서 불가능한 전투를 뒤집어 승리하시던 날 “이는 실로 천행(天幸)이었다”라고 적는다. 하늘이 돕고, 울돌목의 물길이 돕고, 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양안을 하얗게 덮은 채 ‘우리 장군 이제 돌아가셨다!’면서 가슴을 친 조선의 백성들이 도운 승리였기에 곧 천지인이 아우른 승전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 뒤, 이순신 장군의 셋째 아들 ‘면’이 충남 아산에서 왜군의 보복습격을 당해 죽음을 당한다. 더위를 먹었다고 마냥 측은해 하던 막내아들을 영원히 앞장세우시니 한 해 동안, 봄에는 어머니를 잃고 가을에는 자식을 떠나보낸다.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 장군은 남해 관음포에서 자신의 몸과 승리를 바꾸어 돌아가신다. 그러나 하늘은 또 하나의 섭리를 예비 하시니 장군께서 돌아가신 그 날로 부터 304년 뒤 대한의 딸, 유관순이 저물어가는 대한제국의 땅에 태어나고 장군이 출생하신지 335년이 지나고도 하루 뒤인 1932년 4월 29일, 충남 예산이 고향인 윤봉길 의사가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일본의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수통형 폭탄을 투척하고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시니, 순국 당시 25세였다. 윤봉길 의사는 아직 갓난이인 두 아들에게 아버지로서의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아비 없는 자식으로 살아갈 아이들에게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며 훌륭한 인재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절절히 담겨있다. 이제 5월이 오면 가정의 달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많은 기념일이 있다. 공휴일을 단지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니는 날이 아닌 가족 간의 사랑인 효와 민족에 대한 충성, 인류의 평화를 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계기로 삼아 봄은 어떨까?

(사)국학원 원장(대) 및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원암 장영주

* 이 칼럼은 [충남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