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국학원 이사
4월28일은 충무공 탄신일이다. 충무공은 40대 후반에 겨우 입과하여 지금의 러시아 접경지인 녹둔도에서부터 남해 노량전투에서 순국하시기까지 약 10년을 오로지 조국을 구한다면 나는 무엇이 되어도 좋다는 신념 하나로 일관한 참된 공무원이셨다. 임진란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전비, 전력면에서 우세하였던 일본이 조총을 앞세워 조선을 넘어 명까지 삼키려고 한 도요토미와 충무공 한 분과 전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울돌목전투, 장군이 실로 이는 천행이라며 감사의 뜻을 하늘에 올렸던 명량해전 이후 얼마나 울화가 치밀었으면 도요토미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급사를 했을까. 충무공께서 지금 우리 가슴 속에 건재한 이유는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이 그때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은 정신이 바로 서야 한다. 군에서도 체력단련을 위한 얼차려가 있는 이유는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함이다. 얼은 정신이기 때문이다. 충무공의 정신은 바로 효·충·도로 압축된다.

명나라의 사신 운덕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하루는 어두운 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 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 듯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 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 까닭으로 어디를 가시는가 하고 따라가 보았더니 왜군이 잡혀 있는 옥사에 가셔서 15살 된 어린 왜병에게 명심보감 효행 편을 읽어주는 것이 아닌가? 10살의 어린 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 이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 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이다. 포로가 된 지 5년이 지났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이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었던 것이었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사이이지만 저 두 사람을 보면 어찌 원수라고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 사람은 조선 장수 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다. 통제사 영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장군은 군인으로서의 중심철학 즉 충(忠)의 자세가 분명한 분이셨다. 군 생활 10여 년 중에 그는 세 번이나 백의종군을 하셨다. 백의종군은 한마디로 계급 없이 적과 싸우라는 말로 군인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말이다. 장군에서 해임을 당하여 병졸 아래서 근무를 한다는 것이 신분제도가 철저했던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몸뚱이를 발가벗기어 거리를 걷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공심의 자리에서 자기 중심이 바로 서지 않는 한 누구도 함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은 크게 효자·충신·도인이 있다. 도인은 자기와 자기 주변에 대하여 유익이 되도록 리더십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장군은 참 도인이셨다. 7년 전란의 마지막 노량해전을 앞두고 전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3배에 가까운 적과 싸우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가 않았으며 명군은 도움을 주기는커녕 조선백성의 고혈을 빠는 데 쉬지를 않았으며 싸우지 말라는 선조의 지휘서를 무시하고 선전관을 묶은 것은 역모라 하여 전쟁에 이겨도 오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장군 휘하의 군사들 안위와 조정의 안정과 선조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장군은 스스로 적의 적이 되어 총을 맞은 것이었다. 모두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 그래서 일본에까지 진정한 평화를 일깨우신 분이 바로 충무공이시다. 전국에서 천안함 순국 해군들을 위한 추모가 열리고 있다. 그 고귀한 영령들이 장군과 우리 가슴속에서 영원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