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낙성대공원 광장의 강감찬 장군 동상. 사진 강나리 기자. 1천 년 전 고려는 해동성국 발해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제압하던 거란과 26년 전쟁 중이었다. 최근 KBS2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성난 거란의 기세를 꺾고 몽골과의 전쟁 전까지 200년간 평화의 기틀을 닦아 백성들의 오랜 칭송을 받은 강감찬 장군의 눈부신 활약을 조명하고 있다. 서울 관악구에 가면 장군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장군이 태어난 집터와 영정을 모신 사당 안국사를 중심으로 조성된 낙성대공원, 장군의 시호인 인헌과 어릴 때 이름인 은천을 따른 학교들(인헌초‧중‧고, 은천초)이 있다. 2008년 이후 행정동으로 인헌동, 은천동, 낙성대동을 사용하고 있다. 난곡동에 가면 강감찬 장군이 지나다 지팡이를 꽂은 것이 나무가 되었다는 1000년 수령의 굴참나무도 있어 매년 정월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낸다. 낙성대공원 강감찬장군 사당인 안국사에 장군의 탄생설화가 그려진 벽화. 사진 강나리 기자. ‘별이 떨어진 곳, 낙성대’에 얽힌 장군의 탄생 설화는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에 전한다. 《고려사》에 “어떤 사신(使臣)이 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오다가 큰 별이 인가(人家)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관리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사신이 기이하게 여기고는 데리고 개경으로 돌아와 길렀는데 이 사람이 바로 강감찬이다”라고 기록했다. 강감찬 장군과 별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고려 문인 최자가 지은 〈보한집〉에는 장군이 재상으로 있을 때 송나라 사신이 “하늘에서 문곡성(文曲星,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 학문을 관장하는 별)이 사라진 지 오래되어 그 별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강공이 바로 문곡성”이라며 예찬했다고 전한다. 당시 거란과의 전쟁에서 번번이 패하여 엄청난 배상을 하며 어려움을 겪던 송나라 입장에서 강감찬 장군은 신화적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강감찬장군 생가터와 낙성대공원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에서 400m가 채 안 되는 주택가 안쪽에 장군의 일화가 벽에 그려진 낮은 담장을 지나 장군의 생가터가 나온다. 장군이 태어날 때 큰 별이 떨어졌다는 곳이라 기록된 유허비만 서 있는 아주 작은 공간이다. 이곳에는 장군과 더불어 태어났다는 나이 많은 향나무가 한그루 있었는데 1996년 안타깝게 생을 마치고 대신 150년 된 젊은 향나무가 그 터를 지키고 있다. 강감찬 장군 생가터 근처 주택가 낮은 담장에 그려진 강감찬 장군 벽화. 사진 강나리 기자. 지난 9일 방문한 강감찬장군 생가터. 역사 강사와 함께 인물과 유적을 찾아온 탐방객들이 유허비를 둘러싸고 장군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생가터에서 다시 길을 나서 500m정도 거리에 낙성대공원이 나온다. 광장에는 강감찬 장군이 힘찬 기세로 말을 달리는 형상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고, 홍살문을 지나면 ‘안국문’현판이 걸린 외삼문, 그 안에 고려의 백성이 장군을 기려 세웠다는 3층 석탑과 강감찬장군사적비가 좌우에 놓였다. 낙성대공원 내 강감찬 장군의 사당 안국사의 외삼문인 '안국문'. 사진 강나리 기자. 장군의 생가터에 자리했던 사리탑 형태의 화강암 삼층석탑은 1973년 낙성대공원이 조성되면서 옮겨온 것이다. 석탑의 앞면에 ‘강감찬 낙성대 姜邯贊 落星垈’라 새겨져 장군의 출생지임을 나타낸다. 13세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탑꼭대기 세워 놓은 장식 부분인 상륜부가 훼손되어 있다.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집터에 서 있던 사리탑형식의 3층 석탑. 사진 강나리 기자. 고려 백성이 강감찬 장군을 기려 세웠다는 석탑 가운데에 '강감찬 낙성대'라는 글귀가 새겨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다시 내삼문을 지나 약간 경사진 정원을 따라 3층 계단을 오르면 장군의 영정과 일생르 그린 벽화가 있는 사당 안국사가 있다. 안국사는 고려시대 목조 건축을 대표하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본떠 세웠는데 팔작 청기와 지붕이 올려져 웅장한 느낌을 준다.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안국사. 사진 강나리 기자. 이곳 안국문 기둥과 안국사 사당의 기둥은 위보다 중간이 굵고 불룩한 곡선을 이루는 특징을 나타낸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소 과장되게 표현한 듯 하다. 외삼문인 안국문 기둥(왼쪽)과 사당인 안국사 기둥. 사진 강나리 기자. 낙성대공원은 잘 알려지지 않은 덕분에 관광지가 되지 않고 주민의 삶 속에 녹아들어 산책로이자 쉼터로 역할을 하고 있다. 쌀쌀해도 바람결에 봄을 느낄 수 있는 계절에 산책 나온 주민과 아이들이 외삼문 앞 공간에서 투호 등 전통놀이를 체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광장 주변으로는 강감찬전시관과 영상실, 북카페가 있고, 낙성대 유아숲체험원, 반려견놀이터, 낙성대 텃밭이 있고 서울 둘레길과 연결된다. 낙성대공원 주변은 관악산과 이어져 유아숲체험장 등이 조성되어 있고 주민들의 산책로이자 쉼터로 이용된다. 사진 강나리 기자. 낙성대 곳곳에는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해 어린 원님으로 부임한 젊은 시절 백성을 괴롭히는 호랑이, 개구리, 탐관오리 등을 물리친 이야기들이다. 백성들이 장군에게 열망하던 초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의 모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고려사》 열전에 전한 강감찬 장군은 인생의 말년이라 부르는 나이에 가슴에 품은 꿈을 펼치고 나라를 구한 대기만성형의 인물이다. 36세인 고려 성종 2년(983년) 과거에 급제하여 26년 뒤 62세에 예부시랑이 되어 과거시험을 출제하는 지공거 역할을 했다. 실제 장군의 활약은 거란의 2차 침공이 있던 이듬해인 1010년 그의 나이 63세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사》 열전 중 강감찬 장군부분(왼쪽)과 《고려사》.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거란의 2차 침공을 기점으로 3차 침공 때인 1018년 72세 나이로 총사령관인 상원수가 되어 강민첨, 김종현 등 장수들과 함께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펼쳐 흥화진 전투와 귀주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거란의 명장 소배압이 10만 명을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나 장군은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해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뿐이었고, 이후 거란이 다시는 고려를 넘볼 수 없게 했다. 특히, 그는 왕과 백성에게 사랑받는 영웅이었다. 거란 2차 침공 때 항복 대신 그가 홀로 왕의 몽진을 주장해 지연 작전으로 거란을 물리친 후 현종은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좌임인左袵人이 되었을 것”이라 했다. 좌임은 오른쪽 섶을 왼쪽 섶 위로 여미는 북방 민족의 의복 방식으로 야만인을 일컫는 말이었다. 총사령관으로 3차 침공을 승리로 이끈 후에는 현종이 직접 영파역까지 나와 잔치를 열고 금으로 만든 꽃 8가지를 장군의 머리에 꽂아주며 술잔을 권하고 위로와 감탄을 전했다. 또한, 영파역을 ‘의義가 흥한 곳’이라하여 흥의역으로 바꾸고, 역의 관리들에게 관복을 하사하는 등 그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고려사》에는 “당시 풍년이 들고 백성이 안정되어 나라 안팎이 평안하니, 사람들은 그 모두가 강감찬의 공이라고 생각하였다”고 기록했다. 안국사 내 강감찬 장군의 영정. 사진 강나리 기자. 전쟁영웅이라는 것만이 오랜 세월 장군이 사랑받은 이유는 아닐 것이다. 《고려사》에 장군의 인물 됨됨이에 대해 “성품이 청렴하고 검약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중략) 의복은 더럽고 낡아서 보통 사람보다 낫지 않았다”고 평했다. 그는 태조 왕건과 함께 고려를 세운 개국공신 3,200여 명 중에서도 특별히 신흥사 공신당 벽에 초상을 그려 공적을 기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의 아들이었으나 36세에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올랐다. 또한, 그의 행적 중 “강감찬에게는 12결의 땅이 개령현에 있었는데, 왕에게 아뢰어 군호軍戶에게 공급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승리 후에도 장군은 관직이나 부귀영화를 쫓지 않았다.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요청했으나 현종은 수차례 만류하며 궤장(机杖, 팔걸이있는 의자와 지팡이)을 하사하고 사흘에 한 번만 조회에 나오도록 하는 등 배려를 하다가 73세에 사직을 허락했다. 이후에도 국가원로로서 역할을 요청했고, 현종 21년 (1030)년에 그의 나이 83세에 문하시중에 임명해 그를 존중했다. 안국사 내 벽면에는 강감찬 장군의 일대기가 그려져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한편, 그는 무관 출신이 아니라 문관으로서 관직에 올랐다. 거란과의 3차 전쟁 당시에도 뛰어난 전투력이 아니라 정확하게 전황을 파악하고 적을 제압할 전략과 전술을 세우고 여러 장군을 적시에 투입하고 연합해 승리했다. 이는 문관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고려를 전쟁의 화마에서 구하고 적이 넘보지 못할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으로 고민하면서 생을 보낸 결과일 것이다. 또한, 권력이나 명예, 부귀와 같은 사사로운 욕심이 아니라 자신의 조국 고려와 고려의 백성을 위한 공심公心으로 평생을 보낸 장군의 행보는 나랏일을 한다고 나서는 이들의 귀감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순간에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다해 사명을 이루어낸 강감찬 장군은 인생을 사는 지혜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1923년 일제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00년 만에 복원된 광화문 월대 공간. 사진 강나리 기자. 세종대왕이 1442년 친히 궁을 나와 무과시험을 실시하고, 1450년 오색비단 장막을 늘어뜨린 장식 무대인 채붕(彩棚)을 세우고 흥미로운 놀이(잡희雜戲)를 베풀어 백성과 즐거움을 나눈 공간이 새로운 모습을 갖췄다. 훼손되고 파괴된 지 100년 만에 지난해 10월 복원을 마치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광화문 월대 공간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시원하게 쭉 뻗어 나온 월대는 좌우로 날개를 활짝 편 듯한 경복궁 담장과 어우러져 조선의 법궁 정문다운 위용을 되찾았다. 훼손되었던 경복궁의 중심축이 완전하게 복원된 것이다. 그런데 궁궐 전각 앞에 만들어진 월대가 아니라 궁궐 정문에 위치한 월대는 동아시아에서는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궁궐 건축 양식이라 한다. 금단의 영역인 궁궐과 백성들의 거주지 사이를 연결해주는 다리인 셈이다. 월대 앞에서 경복궁을 지키는 해태상. 서쪽 해태상에서 바라본 월대와 광화문. 사진 강나리 기자.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앞으로 시원하게 뻗어나온 월대와 좌우 해태상. 사진 강나리 기자. 일반적으로 월견대(月見臺, 달을 보는 대)에서 유래했다는 월대는 궁궐이나 건물 앞에 놓인 넓은 기단으로 일정한 높이의 단상이다. 건물의 위엄을 높일 뿐 아니라 각종 행사가 펼쳐지는 무대로서 기능했는데 조선에서는 왕과 백성이 소통하던 공간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중종도 이곳에서 무과시험을 지켜보았고, 1539년 궁을 나와 광화문 월대 공간에서 열린 산대놀이를 한참이나 구경하고 들어갔다고 기록되었다. 명종도 광화문에 나아가 무과시험을 실시했으며, 영조는 1744년 백성들의 상언(上言, 왕에게 올리는 문서)을 광화문에서 받도록 명하기도 했다. 또한, 고종 때(1891) 왕세자가 쌀을 하사하는 행사를 하기도 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월대 개방을 앞두고 주최한 포럼에서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는 월대를 “백성과 신하의 입장에서는 궁궐로 향한 길이지만, 반대로 왕의 입장에서는 백성을 향한 길”이라 정의했다. 안 교수는 “조선은 절대왕정이 아니라 왕권과 신권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정치체제를 구축했던 나라이다. 왕의 공간인 경복궁과 왕을 견제할 수 있었던 재상의 공간인 육조거리를 잇는 월대는 대립보다는 견제와 균형의 장소이자 소통의 장소”라고 의미를 해석했다. 오는 1월 21일까지 서울시가 개최하는 '2023 서울 라이트 광화문' 중 광화문 앞에서 펼쳐지는 미디어파사드 쇼 '시공의 문-디지털 광화'가 매일 오후 6시~9시 매시간 정각에 35분간 펼쳐진다. 사진 강나리 기자. 역사 속에서 광화문 월대도 수많은 부침을 겪었다. 임진왜란의 참화로 경복궁이 파괴되면서 방치되었던 월대 공간은 고종 대에 조선의 법궁으로서 경복궁의 재건과 함께 1866년 3월 다시 정비하여 축조되었다. 그러나 1910년부터 일제는 우리 역사의 맥을 끊고 식민지로서의 위치를 건축적으로 나타내고자 본격적으로 경복궁 훼철을 시작했다. 광화문 월대를 포함한 90% 이상의 건축물들을 상징적으로 헐어내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조선 왕의 정치공간인 근정전 바로 앞에 지었다. 1917년 화물 전차 부설에 이어 1923년 경복궁에서 조선부업공진회(박람회)를 개최하고자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기 위해 영추문행 전차선로를 광화문 앞에 개설하면서 월대는 훼철되었고 난간석 등이 철거되었다. (위) 1923년 10월 4일자 동아일보 기사 속 '영추문 전차의 개통과 장식 중인 광화문' 사진. 광화문 앞 훼철된 월대를 볼 수 있다. (아래) 광화문 월대 발굴과정에서 월대를 부수고 Y자 형태의 복선으로 깔린 전차선로의 침목이 노출되었다. 사진 문화재청. 일제는 경복궁의 얼굴인 광화문 또한 없애려 했으나 큰 반발에 부딪히자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했고, 월대 공간을 전차선로와 도로로 사용하면서 그 흔적은 땅 아래에 묻혔다. 옛 경복궁 월대 공간의 모습은 1915년 조선의 마지막 궁중 화가인 심전 안중식이 일제에 의해 이미 훼손되어가던 경복궁의 과거 모습을 그린 ‘백악춘효도’에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구한말부터 1923년까지 촬영된 각종 사진 자료와 1910년 ‘조선고적도보’,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평면도 등 몇몇 도면 자료로도 확인되었다. 2018년부터 본격 복원과정을 밟은 월대는 동구릉에 모여져 있던 난간석과 하엽석, 용두석 등 석물 40여 점을 기초로 원형 부재를 재사용하고, 원형 부재의 표면과 형태를 존중하여 문화유산 수리 장인의 손길에 의해 전통방식으로 다시 탄생했다. 임동조 석장을 포함해 약 30여 명에 가까운 장인들의 땀으로 이루어낸 성과이다. 아울러 지난해 8월, 월대의 중앙 어도(御道, 임금이 다니는 길)의 가장 앞부분을 장식하던 서수상(瑞獸像, 상상 속 상서로운 동물상) 석조각 2점을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 측으로부터 기증받아 월대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했다. (위) 어도의 동쪽 소맷돌로 조각한 서수상의 바깥쪽 모습. (아래 왼쪽) 서쪽 서수상 (아래 오른쪽) 동쪽 서수상 정면 모습.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 측에서 기증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복원된 공간에는 익살스러우면서도 위엄을 갖춘 해치상(해태상)이 좌우를 지키고 어도를 중심으로 장식미를 더한 난간석을 둘러 100년 전 훼철되기 이전의 위용을 자랑한다. 먼저, 어도의 맨 앞 동서에 놓인 서수상은 월대의 석조 부재 중 가장 화려하고 격이 높은 대표 조형물인 소맷돌로 조각된 것이다. 얼굴 절반을 차지하는 큰 코와 부리부리한 큰 눈, 살짝 벌려 큰 어금니가 보이는 큰 입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만히 바라보면 위압적이기보다 살짝 들린 입술 끝이 미소를 짓는 듯 친근하다. 앞발을 턱 아래 괴었고 정수리에는 한 개의 뿔이 났으며, 코에서 시작되는 수염과 눈 뒤쪽에서 시작되는 귀, 턱밑 수염 등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근정전의 서수상이 몸에 비늘이 조각되고 머리에 뿔이 2개로 용으로 추정되는 것과 달리 월대의 서수상은 비늘이 없고 머리에 뿔이 하나인데 해치와 닮은 듯 다르다. 경복궁 재건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경복궁 연건일기》에도 서수상의 명칭을 공란으로 두어 정확한 이름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월대 양 앞에서 목에 큰 방울을 달고 사주를 경계하는 해태상 중 서쪽편. 사진 강나리 기자. 해태는 성군을 도와 일을 하며 능히 사람의 옳고 그름과 선악을 판단하고 벌을 주는 영물스러운 동물이다. 사진 강나리 기자. 월대 남단에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주를 경계하는 해치상(해태상) 두 쌍이 나란히 서 있다. 영물스러운 동물인 해태는 성군을 도와 일을 많이 하며, 능히 사람의 시비곡직(是非曲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만일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벌로 바다에 넘겼다고 한다. 모든 관리들이 궁궐을 출입할 때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니 정신을 차리고 올바른 정치를 하라는 뜻일 것이다. 또한, 경복궁 남측으로 화산(火山)인 관악산이 보임에 따라 불을 먹는 물짐승인 해태를 화재 예방의 의미로 궁궐 앞에 설치한 것이라 한다. 해태상의 원위치는 월대 남단에서 39.2m 떨어진 곳으로 추정되지만 도로 사정으로 인해 현 위치에 자리 잡았다. 광화문 월대는 창덕궁, 덕수궁 정문의 월대와 달리 양쪽에 난간석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진한색의 석재가 동구릉에 보관되었던 원형부재. 사진 강나리 기자. 난간석은 원형 부재와 새로운 부재가 섞여 있는 모습인데 당초 계획으로는 동구릉에 보관되었던 원형 난간석을 전면 배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복원과정에서 배수 등의 관계로 전면으로 갈수록 미세하게 낮아지고 목조건축 기둥의 안쏠림처럼 난간석도 미세하게 안쪽으로 쏠려있다는 점을 발견해 각자 제자리를 찾아 배치했다. 과거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잘못 복원되었던 광화문 현판이 원형 복원된 모습. 사진 강나리 기자. 경복궁 수문장. 화요일을 제외한 매일 10시와 14시 광화문과 홍례문 사이에서 수문장 교대의식(20분간)과 11시와 13시에 파수의식이 진행된다. 사진 강나리 기자. 월대 넘어 3개의 아치문으로 이루어진 광화문(光化門)이 서 있다. 광화는 “빛이 사방으로 퍼지니 그곳에서 이뤄진 것은 만천하에 미친다”라고 하여 올바른 정치를 펼쳐 온 세상에 미치기를 바라는 뜻이다. 광화문의 현판은 과거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잘못 복원되었으나, 검은 바탕의 금색 글씨의 본래 모습을 찾아 단장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얼굴이자 대한민국 역사의 심장부에 위치한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원형 복원된 광화문 현판과 함께 월대의 복원으로 광화문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월대 공간이 또다시 즐거움을 나누고 소통의 공간으로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홍제천 인공폭포 앞 테라스에서 쉬는 시민. 사진 강나리 기자. 녹음 푸른 산에서 쏟아지는 폭포 소리는 머릿속을 비우고 향긋한 커피향 속에 투평한 통창으로 자연을 접하며 독서에 빠져들 수 있다면 어떨까? 홍제천 인공폭포 맞은편에 마련된 폭포책방과 폭포카페. 사진 강나리 기자. 폭포책방 내에서 책을 읽는 시민들. 사진 강나리 기자. 서울 서대문구 홍제천 인공폭포 인근에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환상적인 책방이 생겼다. 지난 9월 1일 폭포책방 아름인도서관은 독서인의 로망을 실현한 공간으로 문을 열었다. 책방 내 통창을 통해 바라본 폭포. 사진 강나리 기자. 통창으로 인공폭포와 안산을 마주하고 바로 앞 데크에는 반려동물과 산책하는 시민과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는 친구, 연인들이 여유를 더한다. 통창 밖 데크에서 휴식하는 시민들. 사진 강나리 기자.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0시부터 19시까지 이용가능하고 책은 7권까지 2주간 대여할 수 있다. 아울러 바로 옆에 위치한 폭포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들어와 책과 커피를 함께 즐길 수도 있다. 책을 고르는 어린 독서인. 사진 강나리 기자. 또 하나의 매력은 인근 안산과 홍제천에서 책과 함께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돗자리와 무릎담요를 대여해 준다는 것이다. 당일 도서 대출 회원에 한하며 당일 오전 10시부터 이용하며, 당일 오후 6시 30분까지 반납만 하면 된다. 홍제천 인공폭포. 사진 강나리 기자. 독서를 즐기는 이에게도 매력적이지만 복잡한 도심에서 시끄러운 머릿속을 비우는 여유를 찾기에도 그만이다. 법정공휴일은 휴무이고 점심시간인 오후 1시~2시에는 이용이 제한된다.
1795년 을묘 능행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속 혜경궁의 조다소반과를 재현한 모습. 정조는 자신의 상차림은 검소하게, 어머니의 상차림은 궁중예법에 따르도록 했다. 사진 궁중음식연구회 한복려정길자 공저 '수라일기' 갈무리. “어스름한 새벽녘 길을 나서 조심조심 건너온 배다리, 행차는 장대하나 자궁(慈宮, 혜경궁)의 착잡한 심정은 헤아리기 어렵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에 앉아 하염없이 큰 강 바라보는 자궁. 수어와 전복, 해삼을 슬쩍 데치고 오색의 각색당과 다식과를 쌓아 꽃 한 송이 살포시 올린다.” 1795년 윤 2월 9일 창덕궁을 떠나온 정조대왕과 어머니 혜경궁이 배다리를 건너 노량참 용양봉저정에 도착해 조다소반과(아침수라 전 다과상)를 올렸다는 《원행을묘정리의궤》 기록이다. 여기서 ‘자궁’은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고 왕세손이 즉위했을 때 죽은 왕세자의 빈을 일컫는 말이다. 용양봉저정 내 을묘능행을 기록한 〈반차도〉 재현그림. 사진 강나리 기자.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정조는 1793년 수원 화성 완공 후 4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창덕궁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까지 능행을 13차례 했지만, 이날은 매우 특별했다. 대외적인 명분은 27세에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남편 사도세자와 동갑이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기 위한 200리 길이었다. 하지만, 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즉위 20년을 맞은 정조가 여전히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에게 그동안 쌓아온 위업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자신을 따르는 친위세력을 하나로 규합하여 장차 화성을 중심으로 펼칠 개혁정치의 구상을 널리 알리겠다는 포부가 서린 길이었다. 정조는 1794년 12월 행사주관 관청인 정리소를 설치하고 채제공에게 총책임을 맡겨 준비할 만큼 을묘능행에 만전을 기했다. 혜경궁에게는 절체절명의 숱한 위기를 넘어 성군이 된 아들과 나선 회갑연길. 그 순간 용양봉저정 툇마루에 서서 도도하게 굽이치는 한강을 바라본 혜경궁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의 효심이 어린 '용양봉저정'. 사진 강나리 기자. 정조의 수원 화성 능행 첫날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처음 머물던 노량행궁의 중심건물이 바로 용양봉저정이다. 이곳 건물터는 본래 선조 때 우의정 이양원이 소유한 ‘망해정’이라는 별서였다. 정조가 1789년 이 터를 구입하여 공사를 시작해 2년 만인 정조 15년(1791)에 완공되었다. 그 2년 후인 1793년 정조는 이곳을 둘러보고 “북쪽의 우뚝한 산과 흘러드는 한강의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대고 봉황이 나는 것 같아 억만년 가는 국가의 기반을 의미하는 듯 하다”가 감탄했다. 그리고 “용이 머리를 들고 봉황이 날아오르는 정자”라는 뜻으로 ‘용양봉저정’이라 명명했다. 당시 정조가 보았던 용과 봉황처럼 꿈틀대는 한강과 북한산의 모습을 아쉽게도 지금은 한강대교와 도로, 한강변 마천루 건물들에 가려 제대로 볼 수 없다. 다만 인근에 가족공원으로 조성된 용양봉저정공원 내 하늘전망대에 서면 그 장면을 가히 짐작해볼 수 있다. 인근 용양봉저정공원 내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한강의 노을. 왼편에서 S자로 크게 휘돌아 내리는 강물의 방향을 볼 수 있다. 왼편으로 여의도 63빌딩 쪽부터 S자로 크게 휘돌아 흘러온 강물은 노들섬 인근에서 넓은 폭으로 도도하게 흘러간다. 맞은편 용산 신도시 뒤편으로 북한산과 남산타워가 우뚝 서 있고, 오른편으로 이촌나루를 지나 동작대교까지 광활한 풍광이 펼쳐진다. 노량행궁이던 용양봉저정은 고종 때 유길준에게 하사되었다가 1930년 일본인 이케다(池田)가 인수했다. 당초 정문과 누정 등 2~3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이케다는 건물 일부를 철거하고 부근 5,300여 평에 온천과 욕장, 운동장, 식당 등 오락시설을 두고 ‘용봉정’이라 고쳤다. 광복 후 국유로 환원해 오락시설을 철거하고 원래 이름을 되찾았으며, 현재 용양봉저정 역사공원이 조성 중이다. 하늘전망대 맞은편 노들섬과 용산의 마천루 건물들 너머 남산 위 타워가 보인다. 사진 강나리 기자. 현재 용양봉저정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정자로, 내부는 원래 마루와 온돌방으로 꾸몄으나 온돌방은 사라지고 지금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로만 되어 있다. 정면 6칸 중 가운데 4칸은 방으로 꾸몄고, 양쪽 각 1칸은 한 단 높게 누마루를 꾸몄다. 정자를 마주하고 왼편 무장애 보행길을 따라 들어서면 소담한 정원 가운데 부드러운 곡선으로 하늘로 슬쩍 들린 지붕 아래 정교한 단청으로 장식되어 아름답다. 정면 지붕 아래는 분합문(分閤門, 들어열림문) 걸쇠가 줄지어 늘어선 모양이 가지런하다. 창살문을 들어 걸쇠에 걸면 마루까지 공간이 시원하게 확장된다. 용양봉저정 현판과 나란히 줄지어 선 분합문 걸쇠. 사진 강나리 기자. 마루에 올라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데 1795년 화성능행 〈반차도〉 재현 그림이 펼쳐져 있다. 반차도에는 1779명의 인물과 779필의 말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악대가 115명, 의장용 깃발을 든 사람이 238명이다. 그림 속에는 정조의 가마가 있지만, 실제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의 가마 뒤편에 말을 타고 있다. 〈반차도〉속 을묘능행 행렬 속 인물들의 낙천적이고 익살스러운 표정이 생생하다. 사진 강나리 기자. 전체적으로 왕조의 위엄과 질서, 그리고 자신감이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장대한 행렬이 엄숙하지만은 않다. 진경 화풍으로 그려진 인물에서 낙천적이고 익살스러운 한국인의 표정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이 반차도는 단원 김홍도의 지휘 아래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 실제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진경眞景시대 쟁쟁한 화원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노량주교도섭도' 속 노들나루(노량진) 일대 동산과 강변에 무수한 군중이 왕의 행차를 구경하기 위해 나와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또한, 한 켠에는 을묘년 능행을 담은 〈정조능행도〉 8폭 병풍 중 ‘노량주교도섭도’ 재현 그림이 있어 1795년 그날의 모습이 생생하다. 능행이 있던 윤 2월은 양력으로 하면 4월 초라 봄 기운이 완연한 때였다. 그림 속 노들나루(노량진) 전경과 함께 하얀 꽃이 만발한 동산과 강변에 왕을 구경하러 나온 군중들이 무수히 많다. 정조는 능행에서 백성들과의 교감을 중시했다. 왕의 행차를 구경하기 위해 나온 백성들을 막지 말라고 명했고, 봄을 맞아 농사를 준비해야 하는 백성들의 불편을 최소화하려 애썼다. 능행에 필요한 비용도 백성의 세금이 아닌 환곡을 이용해 10만 냥을 확보했다. 1795년 을묘 능행 중 정조의 석수라. 어머니 혜경궁의 상차림의 절반으로 검소하게 차리도록 했다. 사진 궁중음식연구회 한복려정길자 공저 '수라일기' 갈무리. 능행을 하는 동안 혜경궁에게 올리는 수라는 왕실 예법에 따르도록 했지만, 정조 자신의 상에는 어머니 상차림의 절반으로 하고, 10여 그릇을 넘지 않도록 경계했다. 정조는 “만약 사치스럽고 장대하거나 법도에 지나치고 남용함이 발견되면 처벌할 것이다”라고 했다. 효와 공경, 절제와 검소를 바탕으로 한 정조의 철학이 드러난 일화이다. 용양봉저정공원에서 바라본 한강대교. 사진 강나리 기자. 한강대교 남쪽 용양봉저정은 서울 지하철 9호선 노들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2분 거리에 있다. 이곳에서 용양봉저정공원이 도보로 9분 거리에 있어 두 곳을 함께 둘러보면 탁 트인 한강과 1795년 능행의 흔적을 함께 볼 수 있다. 용양봉저정공원 내 모습. 사진 강나리 기자. 공원은 아이와 함께 자연환경에서 다양한 친환경 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아기자기한 공간 구성이 멋있다. 특히, 공원 내 카페와 3곳 전망대(하늘전망대, 틈새전망대, 정상전망대)에서 한강이 아름답다는 걸 체감할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관장 김용석)은 2022년 망우동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의 결과를 담은 《신망우동지(新忘憂洞誌)》 보고서를 2023년 6월 발간하였다고 밝혔다.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는 서울역사박물관이 2007년부터 진행한 ‘현대의 동지(洞誌)’ 기록하는 사업이다. 2022년 망우동의 조사 성과를 담은 《新망우동지》는 1760년 간행된 와 262년 시간의 차를 두고 현대의 망우동을 기록한 최초의 사례이다.서울역사박물관 등록유물 1번, 는 망우동 양원리에서 오랫동안 세거한 동래 정씨 종중에서 박물관으로 기증한 유물로 서울
“따앙~!”계곡 너머로 바람을 가르고 포물선을 그리며 145m를 호쾌하게 날아간 화살이 과녁을 때린다. 가슴 속까지 시원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서울 서촌 인왕산 동쪽 기슭 사직단을 지나면 ‘국궁 1번지’, ‘국궁 종가’로 불리는 황학정이 나온다. 도심 한가운데임에도 산자락으로 들어서니 어느새 초록의 향기가 가득하다.황학정 바로 앞 활을 내는 사대射臺 위 벤치에 앉으면 과녁 너머 멀리 서울 도심 건물들이 달걀 바구니 안에 담긴 듯 펼쳐진다. 노을이 지는 저녁이나 동이 트는 아침이면 더욱 황홀한 광경을 마주할 수 있다.주변에 오래된 목
외국인에게 서울에서 5대 궁궐만큼 잘 알려진 명소가 북촌 한옥마을이다. 삼삼오오 한복을 차려입고 북적이는 이곳은 조선왕조 초기부터 명문대가가 자리잡았던 곳이라 현재까지 600여 년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인물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인 곳이기도 하다.이번에 간 곳은 북촌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서 있는 정독도서관이다. 여행자에게 도서관은 특별히 선호하는 공간이 아닐 수 있지만, 서울의 역사만큼 깊은 시공간의 이야기가 잠든 곳이다.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정독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왼쪽에 북악산과 인왕산 전경이 펼쳐진 ‘열린 송현’, 오른쪽에
열린송현의 높은 담장이 걷히고 난 후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의 산세가 드러나고 중턱쯤 푸른 기와지붕을 얹은 청와대가 보인다.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출범한 이래 대통령의 공간이자 주요 국정운영이 결정되는 곳이며, 국빈을 맞아들이던 특별한 장소가 개방되어 국민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24일 이후 전날 예약만 하면 누구나 그 공간을 밟아볼 수 있다.그런데 청와대를 방문하기 전 들러볼 곳이 있다. 광화문 앞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 옥상정원에서 전경을 보면 광화문과 경회루 등 주요 전각, 그 뒤편에 청와대가 일직선상에 놓
경복궁에서 북촌으로 향하는 길, 너른 들판이 펼쳐져 시야가 탁 트인다. 4m 높이의 담장과 고층빌딩들로 가려져 답답했던 공간이 ‘열린송현’이란 이름으로 활짝 열리면서 비로소 한양도성을 둘러싼 아름다운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겸재 정선이 사랑했던 한양의 북악산(옛명칭 백악산)과 인왕산 산세를 바라보면 풍수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이라도 조선 건국 때 왜 이곳을 수도로 삼아 법궁인 경복궁을 앉혔을지 끄덕여 질만큼 감탄이 절로 나온다.서울광장의 3배 넓이나 되는 열린송현은 지금 겨울을 맞아 허허벌판과도 같다. 하지만 오히려 눈앞을 막던 인
서울에 있는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했던 창덕궁에서 500여 미터 남짓 거리 운니동에 궁궐과 사대부가의 형태를 함께 품은 운현궁이 있다. 규모가 웅장한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5대 궁궐의 명성에 가려져 있으나 독특한 한옥 구조와 조선말 격변하던 역사를 품고 있다.운현궁은 조선 제26대 고종(대한제국 광무황제)이 태어난 곳은 아니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머물던 잠저(潛邸)이자 명성황후와 혼인을 한 곳이다. 또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세도정치를 꺾고 왕실의 권위를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