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일(4월 28일)을 맞아 기념행사와 대회, 전시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소장 이성희)는 4월 28일 오전 11시 현충사(충청남도 아산시)에서 이충무공의 국난극복 업적과 정신을 온 국민과 함께 기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제478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한다.이날 주 행사인 다례(茶禮)는 초헌관(初獻官, 현충사관리소장)의 분향(焚香, 향을 피움)‧헌작(獻爵, 술잔을 올림)과 축관(祝官)의 축문낭독으로 구성되는 초헌례(初獻禮), 아헌관(亞獻官, 충무공 후손대표 이재영)이 헌작하는 아헌
일본에서 환수한 서애 류성룡 선생의 대통력(달력)이 지난 24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언론에 처음 공개되었다. 대통력 유물의 정식명칭은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 ‘경자’(柳成龍備忘記入大統曆‘庚子’)》이다.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인 1600년 경자년 달력 여백과 날짜마다 서애 선생은 그날의 날씨, 자신의 소소한 일정, 수많은 방문객, 조보(朝報) 등을 통해 전해 들은 중요한 소식들을 짤막하게 적었다.류성룡 선생은 고향인 하회마을에 은거하는 동안에도 무척 분주한 일정을 보냈음을 알 수 있고,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어 그의 일상을 짐작
임진왜란 당시 군사전략가로 활약하며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한 서애 류성룡 선생의 손때가 뭍은 400여 년 전 ‘대통력’이 일본에서 환수되어 돌아왔다.대통력은 지금의 달력에 해당되는 조선의 책력(冊曆)으로, 이번 대통력에는 달력에 일정을 메모하듯 류성룡 선생이 자필로 메모를 한 자료이다.공식 명칭은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柳成龍備忘記入大統曆)》이며, 문화재청은 11월 24일 오전 10시 30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언론에 첫 공개했다.해당 유물은 일본에서 환수한 국외소재문화재이다. 일본에서 개인이 현지 경매를 통해 소장한 것을
“온 산천이 피로 물들고 계곡마다 하얀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시체 썩은 물과 핏물이 계곡을 흐르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혹한 전란.”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에 기록한 임진왜란의 참상이다.당시 조선인 100만 명 이상이 죽었으며, 이와 동시에 수많은 문화재와 함께 역사기록까지 불타 없어졌다. 1592(선조25)년 이전의 '승정원일기'가 모두 불타 없어졌음에도 선조 즉위 초 10년간의 기록을 되살릴 수 있던 것은 미암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 덕분이었다.담양 10정자 중 ‘호남삼현湖南三賢’으로 불리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제의 침략에 맞서 대를 이어 자결로 항일정신을 일깨운 유도발·유신영 선생 부자를 2020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유도발(1832.6.~1910.10.음력)․유신영(1853.6.~1919.3.) 선생 부자는 풍산이 본관인 서애 유성룡의 10세, 11세 후손이다.이들 부자는 충효를 가업으로 삼아 경술국치와 광무황제 고종의 서거를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아버지는 나라에 의리를 실천했고 아들은 나라와 아버지에 충효를 실천했다.두 분의 자결은 일제의 침략에 맞선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의 생생한 기록으로는 영의정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懲毖錄》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군을 총괄 지휘했던 우의정 약포 정탁의 《임진기록壬辰紀錄》이 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임진전쟁 당시 광해군을 보좌해 분조에서 종합적으로 전쟁을 지휘한 정탁이 업무상 접한 각종문서를 모아 정리한 《임진기록》을 국내 최초로 완역해 발간했다.《임진기록》에는 조선과 명, 일본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국제전에서 조선이 겪은 전쟁과정과 위기극복을 위한 노력이 담긴 현실적인 자료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주요
1910년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부끄러운 날이다. 이보다 317년 전,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을 향해 "어서 가서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는 한 어머님의 당부가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한 당부이시다. 나라의 치욕은 이미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부터 시작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에 이어 1910년 경술국치
임진왜란은 1592년 음력 4월 13일, 당시의 양력으로는 5월 23일에 일어난다. 근세조선이 건국하고 꼭 200년 뒤,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한 해로부터 100년 뒤의 일이다. 일본열도는 100여년에 걸친 내란 끝에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토를 통일한다. 그는 곧 최고의 섭정직인 ‘관백’에 올라 곧바로 ‘다이묘’들의 넘치는
97년 전인 1919년 3월 1일 '기미년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일어난 비폭력평화운동은 유관순(柳寬順) 열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분의 하나밖에 없는 숭고한 목숨과 자유를 빼앗고 다치게 하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당시 지구의 3/4이 식민지가 되고 원주민들은 갑자기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우리 선조의 ‘3.1만세 운동’은
오늘은 근대 문화유산의 상징적인 공간, 정동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정동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을 말한다. 정동하면 뭔가 정겹고 동적인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근세조선의 도읍지였고 대한제국의 수도이자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 그 중에서도 가장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정동, 그 정동을 모처럼 다녀왔다. 정동 기행을 통해 민족의 아픔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