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생활상과 문화 등을 보여주는 특별한 전시와 공개 행사가 잇따라 열려 역사문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고려도기의 생생한 모습을 선보이는 특별전 「고려도기 - 산도해도 주재도기(山島海道 舟載陶器) -」를 오는 2024년 1월 14일까지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서 개최한다. 문화재청은 지난 9월 6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통해 일본에서 환수한 고려 나전칠기《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를 언론에 최초 공개했다.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는 지난달 29일과 30일 고려 강도시기 사찰유적으로 알려진 강화 전(傳) 묘지사지에
1795년 을묘 능행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속 혜경궁의 조다소반과를 재현한 모습. 정조는 자신의 상차림은 검소하게, 어머니의 상차림은 궁중예법에 따르도록 했다. 사진 궁중음식연구회 한복려정길자 공저 '수라일기' 갈무리. “어스름한 새벽녘 길을 나서 조심조심 건너온 배다리, 행차는 장대하나 자궁(慈宮, 혜경궁)의 착잡한 심정은 헤아리기 어렵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에 앉아 하염없이 큰 강 바라보는 자궁. 수어와 전복, 해삼을 슬쩍 데치고 오색의 각색당과 다식과를 쌓아 꽃 한 송이 살포시 올린다.” 1795년 윤 2월 9일 창덕궁을 떠나온 정조대왕과 어머니 혜경궁이 배다리를 건너 노량참 용양봉저정에 도착해 조다소반과(아침수라 전 다과상)를 올렸다는 《원행을묘정리의궤》 기록이다. 여기서 ‘자궁’은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고 왕세손이 즉위했을 때 죽은 왕세자의 빈을 일컫는 말이다. 용양봉저정 내 을묘능행을 기록한 〈반차도〉 재현그림. 사진 강나리 기자.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정조는 1793년 수원 화성 완공 후 4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창덕궁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까지 능행을 13차례 했지만, 이날은 매우 특별했다. 대외적인 명분은 27세에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남편 사도세자와 동갑이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기 위한 200리 길이었다. 하지만, 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즉위 20년을 맞은 정조가 여전히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에게 그동안 쌓아온 위업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자신을 따르는 친위세력을 하나로 규합하여 장차 화성을 중심으로 펼칠 개혁정치의 구상을 널리 알리겠다는 포부가 서린 길이었다. 정조는 1794년 12월 행사주관 관청인 정리소를 설치하고 채제공에게 총책임을 맡겨 준비할 만큼 을묘능행에 만전을 기했다. 혜경궁에게는 절체절명의 숱한 위기를 넘어 성군이 된 아들과 나선 회갑연길. 그 순간 용양봉저정 툇마루에 서서 도도하게 굽이치는 한강을 바라본 혜경궁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의 효심이 어린 '용양봉저정'. 사진 강나리 기자. 정조의 수원 화성 능행 첫날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처음 머물던 노량행궁의 중심건물이 바로 용양봉저정이다. 이곳 건물터는 본래 선조 때 우의정 이양원이 소유한 ‘망해정’이라는 별서였다. 정조가 1789년 이 터를 구입하여 공사를 시작해 2년 만인 정조 15년(1791)에 완공되었다. 그 2년 후인 1793년 정조는 이곳을 둘러보고 “북쪽의 우뚝한 산과 흘러드는 한강의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대고 봉황이 나는 것 같아 억만년 가는 국가의 기반을 의미하는 듯 하다”가 감탄했다. 그리고 “용이 머리를 들고 봉황이 날아오르는 정자”라는 뜻으로 ‘용양봉저정’이라 명명했다. 당시 정조가 보았던 용과 봉황처럼 꿈틀대는 한강과 북한산의 모습을 아쉽게도 지금은 한강대교와 도로, 한강변 마천루 건물들에 가려 제대로 볼 수 없다. 다만 인근에 가족공원으로 조성된 용양봉저정공원 내 하늘전망대에 서면 그 장면을 가히 짐작해볼 수 있다. 인근 용양봉저정공원 내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한강의 노을. 왼편에서 S자로 크게 휘돌아 내리는 강물의 방향을 볼 수 있다. 왼편으로 여의도 63빌딩 쪽부터 S자로 크게 휘돌아 흘러온 강물은 노들섬 인근에서 넓은 폭으로 도도하게 흘러간다. 맞은편 용산 신도시 뒤편으로 북한산과 남산타워가 우뚝 서 있고, 오른편으로 이촌나루를 지나 동작대교까지 광활한 풍광이 펼쳐진다. 노량행궁이던 용양봉저정은 고종 때 유길준에게 하사되었다가 1930년 일본인 이케다(池田)가 인수했다. 당초 정문과 누정 등 2~3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이케다는 건물 일부를 철거하고 부근 5,300여 평에 온천과 욕장, 운동장, 식당 등 오락시설을 두고 ‘용봉정’이라 고쳤다. 광복 후 국유로 환원해 오락시설을 철거하고 원래 이름을 되찾았으며, 현재 용양봉저정 역사공원이 조성 중이다. 하늘전망대 맞은편 노들섬과 용산의 마천루 건물들 너머 남산 위 타워가 보인다. 사진 강나리 기자. 현재 용양봉저정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정자로, 내부는 원래 마루와 온돌방으로 꾸몄으나 온돌방은 사라지고 지금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로만 되어 있다. 정면 6칸 중 가운데 4칸은 방으로 꾸몄고, 양쪽 각 1칸은 한 단 높게 누마루를 꾸몄다. 정자를 마주하고 왼편 무장애 보행길을 따라 들어서면 소담한 정원 가운데 부드러운 곡선으로 하늘로 슬쩍 들린 지붕 아래 정교한 단청으로 장식되어 아름답다. 정면 지붕 아래는 분합문(分閤門, 들어열림문) 걸쇠가 줄지어 늘어선 모양이 가지런하다. 창살문을 들어 걸쇠에 걸면 마루까지 공간이 시원하게 확장된다. 용양봉저정 현판과 나란히 줄지어 선 분합문 걸쇠. 사진 강나리 기자. 마루에 올라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데 1795년 화성능행 〈반차도〉 재현 그림이 펼쳐져 있다. 반차도에는 1779명의 인물과 779필의 말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악대가 115명, 의장용 깃발을 든 사람이 238명이다. 그림 속에는 정조의 가마가 있지만, 실제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의 가마 뒤편에 말을 타고 있다. 〈반차도〉속 을묘능행 행렬 속 인물들의 낙천적이고 익살스러운 표정이 생생하다. 사진 강나리 기자. 전체적으로 왕조의 위엄과 질서, 그리고 자신감이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장대한 행렬이 엄숙하지만은 않다. 진경 화풍으로 그려진 인물에서 낙천적이고 익살스러운 한국인의 표정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이 반차도는 단원 김홍도의 지휘 아래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 실제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진경眞景시대 쟁쟁한 화원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노량주교도섭도' 속 노들나루(노량진) 일대 동산과 강변에 무수한 군중이 왕의 행차를 구경하기 위해 나와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또한, 한 켠에는 을묘년 능행을 담은 〈정조능행도〉 8폭 병풍 중 ‘노량주교도섭도’ 재현 그림이 있어 1795년 그날의 모습이 생생하다. 능행이 있던 윤 2월은 양력으로 하면 4월 초라 봄 기운이 완연한 때였다. 그림 속 노들나루(노량진) 전경과 함께 하얀 꽃이 만발한 동산과 강변에 왕을 구경하러 나온 군중들이 무수히 많다. 정조는 능행에서 백성들과의 교감을 중시했다. 왕의 행차를 구경하기 위해 나온 백성들을 막지 말라고 명했고, 봄을 맞아 농사를 준비해야 하는 백성들의 불편을 최소화하려 애썼다. 능행에 필요한 비용도 백성의 세금이 아닌 환곡을 이용해 10만 냥을 확보했다. 1795년 을묘 능행 중 정조의 석수라. 어머니 혜경궁의 상차림의 절반으로 검소하게 차리도록 했다. 사진 궁중음식연구회 한복려정길자 공저 '수라일기' 갈무리. 능행을 하는 동안 혜경궁에게 올리는 수라는 왕실 예법에 따르도록 했지만, 정조 자신의 상에는 어머니 상차림의 절반으로 하고, 10여 그릇을 넘지 않도록 경계했다. 정조는 “만약 사치스럽고 장대하거나 법도에 지나치고 남용함이 발견되면 처벌할 것이다”라고 했다. 효와 공경, 절제와 검소를 바탕으로 한 정조의 철학이 드러난 일화이다. 용양봉저정공원에서 바라본 한강대교. 사진 강나리 기자. 한강대교 남쪽 용양봉저정은 서울 지하철 9호선 노들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2분 거리에 있다. 이곳에서 용양봉저정공원이 도보로 9분 거리에 있어 두 곳을 함께 둘러보면 탁 트인 한강과 1795년 능행의 흔적을 함께 볼 수 있다. 용양봉저정공원 내 모습. 사진 강나리 기자. 공원은 아이와 함께 자연환경에서 다양한 친환경 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아기자기한 공간 구성이 멋있다. 특히, 공원 내 카페와 3곳 전망대(하늘전망대, 틈새전망대, 정상전망대)에서 한강이 아름답다는 걸 체감할 수 있다.
버선코를 닮은 지붕 처마선과 바람결에 소리나는 풍경風磬, 마당 한켠 소담한 꽃밭과 텃밭, 햇볕 가득 머금은 이불이 널린 빨랫줄, 우리 온돌 특유의 온기를 품은 한옥에서 하룻밤은 한국에서 누릴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을 모두 모은 집합체라 할 수 있다.단순한 아름다움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국인 특유의 성정이 엿보이는 한옥에서 오롯이 쉬는 한옥스테이는 20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다 코로나 세계적 대유행이 한창이던 2021년 1월부터 4월까지 tvN 예능 ‘윤스테이’(연출 나영석, 김세희)가 전남 구례 쌍산재를
서울에 있는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했던 창덕궁에서 500여 미터 남짓 거리 운니동에 궁궐과 사대부가의 형태를 함께 품은 운현궁이 있다. 규모가 웅장한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5대 궁궐의 명성에 가려져 있으나 독특한 한옥 구조와 조선말 격변하던 역사를 품고 있다.운현궁은 조선 제26대 고종(대한제국 광무황제)이 태어난 곳은 아니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머물던 잠저(潛邸)이자 명성황후와 혼인을 한 곳이다. 또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세도정치를 꺾고 왕실의 권위를 세
강형원 기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퓰리처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1963년 한국에서 태어나 1975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미국 UCLA에서 정치학·국제외교학을 전공한 뒤 LA 타임스, AP 통신, 백악관 사진부, 로이터 통신 등 미국 주류 언론사에서 사진 기자로 근무하며 LA 4·29 폭동, 이라크 전쟁, 9·11 테러 등 국제적인 뉴스를 발 빠르게 취재했다. 또한 6·10 민주 항쟁, 1988년 서울 올림픽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카메라에 담았으며, 1995년과 1997년에는 북한을 방문해 북한 주민의 삶을
“윷이다! 윷” “도 나와라! 도”네 개의 윷가락이 젖혀지고 엎어지는 형태에 따라 남녀노소가 열광하던 전통놀이 ‘윷놀이’가 국가무형문화재가 된다.문화재청은 지난 26일 ‘윷놀이’를 신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예고 했다. 약 30일간 예고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여부를 최종 결정하게 된다.윷놀이는 주로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가족, 친척, 마을 단위로 즐기던 전통놀이였으나 단오, 추석 등 각종 명절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면 어김없이 등장해 지속되어왔다. 양편으로 나뉘어 윷가락을 던져 엎어지고
한복은 오랜 세월 한국인의 삶과 함께 했다. 가족공동체를 중심으로 전승되어 인생에서 주요한 순간마다 특별한 의미를 담아 짓는 한복이 있었다.갓 태어난 아이에게는 ‘배냇저고리’를 입혔다. 연약한 아이의 피부에 닿는 옷이라 부드럽고 자극이 없어야 하기에 가능한 한 솔기를 적게 지었다. 만 1살, 돌을 맞은 아이에게는 돌복으로 ‘까치두루마기’를 입혔다. 까치설날로 불리는 섣달그믐(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에도 아이들에게 입혔고 때로는 설빔으로 입혔다. 까치두루마기에 붙이는 색동소매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闢邪), 운수가 좋을
문화역서울284에서 5월 29일(일)까지 공예기획전 '사물을 대하는 태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공예, 사진, 디자인, 영상 등 총 38팀의 290여 점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번 기획전은 2021년 밀라노 한국공예전에서 선보였던 동명의 주제를 문화역서울284 공간에 맞게 새롭게 재구성한 전시로 더욱 의미가 깊다. 전시는 총 3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서는 하늘, 땅,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대지의 사물들'을, 2층은 한국의 다양한 생활문화를 담은 공예 '생활의 자세들'과
한국인만이 가진 특성이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이화정신 홍익정신은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이면 모두 다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온돌 문화, 전 세계에 온돌 문화는 우리밖에 없어요. 북방에서 내려온 겁니다. 그리고 김장 문화도 역시 우리밖에 없어요.'스크린 문화'를 아시나요? 미국에 잠깐 유학 갔다 온 제자 녀석이 "선생님,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어요"라고 해요. "왜?" 자기가 방에 있는데 아버지가 노크도 안 하고 툭 문을 연대요. 그러면서 우리나라가 아직 멀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건주정하지
490년 전, 소쇄옹 양산보가 담양의 깊은 골짜기에 자신의 삶을 바쳐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세계와 조선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담아 조성한 소쇄원瀟灑園. 소쇄원은 우리나라 별서정원의 표본이자 정수로,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명소이다.아침 물안개가 피어올라 신비감을 주는 산들로 둘러싸인 소쇄원의 초입에서 만난 것은 10미터를 훌쩍 넘는 굵고 키 큰 왕대숲 오솔길이었다. 완만하게 구부러진 길을 걷다 보면 한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며 대나무 잎이 바람결이 나풀나풀 꽃잎처럼 떨어져 속세와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설렘을 안긴다.숲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