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모화의 성리학이 국가・사회를 유지하는 사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범람하는 일제 식민사학으로 인해 민족정기 수호마저 위태롭던 구한말, 선도사학은 대종교사학 형태로 역사에 재등장하였다.1909년 서울에서 나철과 오기호가 중심이 되어 중창한 대종교(大倧敎:初名 단군교(檀君敎))는 독립운동을 목표로 세워진 종교단체로서, 수행에 기반한 민족 고유 선도사상을 종교 형태으로 되살린 것이었다. 대종교는 사상면에서 선도 경전인 《삼일신고(三一 誥)》를 중심으로 하였고, 수행면에서 선도의 지감・조식・금촉 수행론을 따랐다(성통). 실천면에서는
홍암나철기념사업회(회장 박오체)는 11월 19일 홍암 나철 선생 순국 제103주기 추모제를 나철 선생의 생가가 있는 전남 보성 홍암나철선생기념관에서 개최한다.이날 홍암나철선생선양회 임원과 회원을 비롯하여 군민 등 200여명이 참석해 나철 선생을 추모한다. 추모제는 국민의례에 이어 초혼비 제막, 살풀이 공연, 약사보고, 경과보고, 헌화 및 분향, 추모사, 폐식 순으로 진행한다.홍암 나철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인영(寅永)이고 호는 홍암(弘巖), 또는 경전(經田)이라
코리안스피릿은 올해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일항쟁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10명을 선정했다. 코리안스피릿이 선정한 독립운동가는 석주 이상룡(1858-1932), 홍암 나철(1863-1916), 우당 이회영(1867-1932), 홍범도 장군(1868-1943), 남자현 여사(1872-1933), 주시경(1876-1914), 단재 신채호(1880-1936), 서일(1881-1921), 김좌진 장군(1889-1930), 이봉창 의사(1901-1932)이다.2월에 소개한 석주 이상룡 선생에 이어 홍암 나철 선생
전남 보성군은 10월 23일 홍암 나철기념관에서 ‘홍암 나철선생 순명 102주기 추모행사’를 개최했다. 추모제는 홍암 나철선양회(회장 정상우) 주관으로 기관·단체장, 나철 선양회, 나씨 종친회, 군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건하게 진행됐다.정상우 회장은 “홍암 나철선생 기념관 개관 2주년과 함께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남기신 숭고한 정신과 사상을 기리고 받들며, 우리 고장이 의향의 성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각별한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김철우 보성군수는 추모사를 통해 “통일에 대한 훈풍이
홍암 나철 선생(弘巖 羅喆, 1863년~1916년)의 본명은 ‘나두영’ 또는 ‘나인영’이다. 근세조선이 기울어 가는 서기 1863(단기 4196)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29세 때 문과에 급제한다. 이후 선생은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역임하였다.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미국, 영국 등 열강들과 침략 상호 묵인체제를 구축
장소가 중요하다. 일제의 눈을 피해서 독립운동을 하려면 비밀리에 모일 수 있어야 한다. 1913년 달성친목회원으로 평소 국권 회복에 대한 뜻을 가지고 있던 서상일(徐相日), 이시영(李始榮), 박영모(朴永模) 등은 윤창기(尹昌基)가 안일사(安逸寺)에서 약을 먹기 위해 체재 중인 점을 빌미로 모임을 가진다. 이들은 이곳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고 임시정부에
한글날을 맞이하여 일제시대 한글을 지켰던 분들이 생각난다. 주시경과 그에게서 직접 배웠거나 아니면 사숙한 제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한글학자인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단군을 믿었던 대종교인들이라고 하는 것은 잘 모르고 있다. 이들은 한글 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신문, 잡지, 강연 등을 통해 단군과 국학을 소개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비록 역사학자는 아
맑은 날씨가 점차 흐려졌다. 7월17일 오후 청산리대첩기념비를 뒤로 하고 동으로 대종교 삼종사 묘역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한두 방울 떨어졌다.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
“동학의 투쟁이 있었기에 삼일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고, 대종교도 동학보다는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대종교는 동학에 이어서 무장투쟁과 한글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적극적으로 기술해 나아가야만 한국인의 정체성 교육이 이루어질 것이다.”조남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사진)는 14일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
지난 2011년 8월 13일 광복절을 앞두고 대종교 총본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대종교 관계자는 두 손 가득히 오래된 책들을 가져왔다. 독립운동가 유품에 나온 단군영정 사진이었다.(클릭)“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신건식(申健植) 선생님의 집에서 유품으로 나온 단군 영정을 직접 봤어요. 이 정도 크기인 것 같아요. 당시에 직접 품에 가지고 다니기에는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