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리얼리즘 소설의 걸작으로 꼽히는 조지 엘리엇(본명 메리 앤 에번스, 1819~1880)의 《미들마치(Middlemarch)》(1870~1871)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436・437번)으로 출간되었다.《미들마치》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 사회적 규범이 개인의 욕망, 나아가 삶에 미치는 영향과 인간 본성의 명암을 포괄적으로 고찰한 대작이다. 1832년의 제1차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기 직전인 즉 1830년대의 영국 중부의 한 지방도시 미들마치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다룬 이야기로 ‘지방생활의 연구(A Study of Provi
갤러리마리(서울시 종로구 경희궁1길 35)는 2024년 1월 26일(금)까지 김근중 · 김선두 · 김천일 · 신하순 · 이용순 작가의 기획전 《Simple & Calm : 수수덤덤》을 개최한다. 예술은 물론이고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의 많은 것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다섯 명의 작가를 통해 ‘한국화’, ‘한국의 미’, ‘한국적인 것’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치를 지니고 있는 본질을 모색하고 고정된 하나의 틀에 안주하거나 얽매이지 않는 창작의 모습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한국화(동양화
- 유교사회에서 복식은 특별한 의미, 공자도 TPO에 맞는 의복착용 강조했다우리 한복을 비롯해 동양의 복식문화는 사람들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서울역사편찬원 김윤정 전임연구원은 “동아시아 유교 사회에서 복식은 예禮 질서의 확립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고 정의했다.공자는 “군자의 상황에 따른 의복 착용”을 강조했는데 현대의 패선 개념으로 보자면 ‘TPO(시간, 장소, 상황)’에 맞는 옷이라 하겠다. 맹자 역시 “의례를 행함에 의복이 구비되는 것을 필요조건의 하나”라며 올바른 복식의 착용을 “치국治國의 기본”으로 여겼다. 옷차림이
명나라 초기 수도인 남경(소주지역)에서 유행한 조선의 '마미군'패션. '명헌종원소행락도'를 통해 황궁의 궁인들이 마미군을 입어 하의가 우산처럼 퍼진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 조선 전기 무려 폭 5.5m(아파트 2층 높이) 치마 ‘마미군’패션 짐작 “〈마미군〉은 조선에서 시작되어 경사(京師, 남경)로 유입되었다. 경사 사람들이 사서 입었으나, 아직 이를 직조할 줄 아는 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부유한 상인과 귀공자, 기생들만 입었는데 이후 무신들도 많이 입었다.” 15세기 중후반 당시 명의 수도 남경(소주 일원)에서 조선의 옷이 크게 유행했다는 명나라 관료 육용(1436~1497)의 문집 ≪숙원잡기≫의 내용이다. 하지만 육용은 명나라의 ‘강남 스타일’이 되어버린 마미군 패션이 몹시도 거슬렸나 보다. “(마미군을) 입은 사람이 날로 많아져서, 성화 황제(명 헌종, 재위 1464~1487) 시기 말에는 조정 관료들도 많이 입었다. 아랫도리에 허황되고 사치스럽게 옷을 입는 자는 예쁘게 보이고자 할 뿐”이라며 각로, 예부상서의 실명까지 일일이 거론하며 비꼰다. 또한, “어린 후작과 백작, 부마 중에는 활시위로 옷자락을 꿰어 입는 자까지 있었다. 대신 중 마미군을 입지 않는 이는 이부시랑 여순 한 사람뿐이었다”고 했으니 명 황실까지 점령한 마미군의 위세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렇듯 황제의 성 안팎 부유층을 강타한 조선의 드레스 패션은 명 정부가 대단히 우려할 만한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부유층의 사치는 물론 군수품인 관청 군마의 갈기와 꼬리털까지 잘라가 군마 공급에 차질을 빚었다고 한다. 명대 학자 풍몽룡이 집성한 《고금담개》의 내용이다. 결국, 홍치제(재위 1487~1505) 초기 마미군 착용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난 후에도 명의 패션 도시 소주지역에 살았던 남경사람들은 북경 거리에서 마미군 패션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명대 학자 심덕부(1578~1618)의 《만력야획편》에 명나라 관료들이 즐겨 입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들이 후안무치했다”고 비판했다. 마미군은 말총으로 만든 속치마로, 대슘치마를 상상하면 된다. 사진 담인복식미술관 소장. 그럼, 원나라 간섭기에 원 황실을 비롯한 귀족, 상인 등을 사로잡은 고려의 패션 ‘고려양’에 이어 곧바로 명나라를 강타한 〈마미군〉은 도대체 무엇일까? 마미군은 말총, 즉 말의 갈기와 꼬리털을 직조해 만든 속치마로, 서양의 페티코트(petticoat)처럼 하의를 부풀려서 가벼우면서도 풍성하고 자연스럽게 퍼지도록 만드는 기능을 했다. 이를 입으면 겉옷이 우산처럼 퍼진다고 했는데 〈명헌종원소행락도〉 그림 속 궁인들의 차림을 보면 남녀 모두 치마와 겉옷 하의 부분이 우산처럼 부풀어있다. 동북아역사재단 구도영 연구위원은 “주로 육지와 멀리 떨어져 면포를 구하기 어려웠던 제주에서 면직물 대신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말의 털을 이용해 직조한 것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한복의 속옷 중 모시에 풀을 먹여 제조하는 ‘대슘치마’를 상상하면 된다”고 했다. 지난 7월 22일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한국의 옷과 멋' 학술회의에서 발표하는 구도영 연구위원.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그런데 명나라 사람들을 그토록 사로잡은 마미군이 정작 주산지인 한국에서 한복의 일부로 전하진 않는다. 짐작하건대 조선문화의 핵심지역인 수도 한양 등과 멀리 떨어진 섬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제품인 데다가 이를 충분히 대체할 직물이 있는데 굳이 구하기 어려운 말총으로 만든 제품을 선호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한편, 국내에서도 마미군 패션을 짐작할 기록이 나온다. 당시 조선에서는 말총 옷을 ‘종의鬃衣’라고 불렀다. ≪성종실록≫에 특진관 유자광이 1490년 “제주에서 수령들이 불법적인 일을 많이 하는데 종의를 짜기 위해 마미(馬尾, 말의 꼬리털)와 마렵(馬鬣, 말의 갈기)을 다 잘라가 거의 다 없어졌다”는 보고내용이 나온다. 명나라에서 발생한 일이 조선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유자광은 “최부라는 사람이 풍랑으로 제주에서 중국(남경과 가까운 해안)으로 표류했는데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이 ‘종의를 가지고 왔는가?’ 묻고는 없다고 하자 ‘전에 (제주에서 온) 이섬은 종의를 많이 팔았는데 너만 없는 걸 보니 가난한 유생이구나’라고 했다”는 내용까지 전하며 “강력하게 종의를 금지해야 한다”고 읍소했다. 마미군 패션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 1500년대 경기도 양주의 남양 홍씨 묘에서 발굴된 한복 복원품. 치마 폭이 550cm 아파트 건물 2층 높이로, 이런 치마를 입기위해 가벼우면서 볼륨감을 살려줄 속옷이 필요했다. 사진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또한, 마미군 패션을 짐작할 조선의 유물도 있다. 경기도 양주 남양 홍씨 묘에서 출토한 한복을 복원하면 치마의 폭이 5.5m로 아파트 건물 2층 높이와 맞먹는다. 이런 치마를 끌리지 않게 입으려면 가벼우면서도 볼륨감을 살려줄 속옷은 필수였던 것이다. 현재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한 복원된 거들치마를 보면 치마 앞을 접어 올렸고, 치마의 앞면은 95cm, 뒷면은 129cm로 19세기 서양의 화려한 드레스 패션과도 견줄 만하다. (2편 계속)
고구려인의 문자문화를 알 수 있는 유물 중 대표적인 비석은 광개토태왕비(정식 명칭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일 것이다.동북아역사재단 고광의 연구위원은 이번 7월 발간한 연구서 〈고구려의 문자문화〉에서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이전에는 묘비를 세우지 않았는데 5세기 확대된 국력과 외교력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입비(立碑, 비석을 세움)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독립적인 서체 양식인 ‘광개토태왕비체’를 사용했다”고 밝혔다.고구려가 비석에 글을 새겨 통치에 활용한 것은 초기 국가 제도를 정비하는 때부터였다. ≪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이 즉위 46년
극단 시민이 제47회 정기공연으로 안톤 체호프의 연극 를 7월 19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열린극장 무대에 올린다.1976년 창단한 극단 시민은 광주 대표 극단으로 올해 창단 47주년을 맞아 를 새롭게 제작하였다. 각색ㆍ연출 김민호, 출연 김수옥 신온주 김현주 정낙일 이재룡 조정훈 장원 조유진 허난.는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4대 비극의 하나로 (1896) (1897)에 이어 1900년에 창작된 작품이다. 4대 비극 마지막 작품은 (1903).연극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던 당시 사회에서는 절대적으로 사상통합이 필요했기에 원광법사(541 – 630)는 전통사상과 불교사상의 통합의 결과로 세속오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인 공존을 위한 형식적인 통합에 그쳤고 원효대사(617-686)에 이르러 현실적인 타협을 넘어선 사상적인 화해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원효대사의 사상을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고 부릅니다.원효대사의 화쟁(和諍)은 화(和)와 쟁(諍)을 정(正)과 반(反)에 두고 그 사이에서 타협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합(合)이 아니라, 정과 반이 대립할 때 오히려 정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성아트홀에서 오는 7월 24일부터 8월 27일(5주)까지 열리는 제2회 어쩌다 연극 페스티벌은 웃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희극전’이다.이번 페스티벌은 극단 감동프로젝트, 극단 풍등, 극단 디피스토리, 극단 야간비행, 극단 등대, 극단 어드벤처 프로젝트이 합동하여 기획했다.'제2회 어쩌다 연극 페스티벌'은 '희극전'을 슬로건으로 각 극단은 순서대로 , , , , 총 5개의 작품을 선보인다. 작품마다 각기 다른 연출가 5명
‘생이 아름다운 극단’은 오는 7월 20일부터 7월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코델 아트홀에서 몰리에르 기획전 두 번째 작품 연극 〈귀족수업〉을 공연한다.이라는 제목으로 쓴 은 1670년 루이 14세로부터 공연 14일 전에 위임받아 몰리에르가 대본을 작성하고 릴리가 작곡을 한 5막의 코메디 발레였으나, 몰리에르는 이것을 무용 장면이 삽입되는 정도의 코메디 연극으로 완전히 바꾸었다.터어키 대사인 술레이만 아가가 1669년 루이 14세의 궁정을 방문하였을 때 오스만 황제의 궁정이 태양왕의 것
(사)풍류도협회는 6월 10일 대둔산 풍류도 예술원에서 대둔산 풍류도 20주년 기념 제17회 풍류문화축제를 개최했다.이날 행사는 풍류도 학술대회, 풍류 지신밟기, 국악공연, 풍류 경연대회 및 대동한마당으로 진행됐다.풍류도 학술대회에서 신라얼문화연구원 정형진 원장은 “풍류도는 환웅의 도이다”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풍류도의 핵심 원리와 뿌리, 그 전개의 흐름을 소개했다.정 원장은 “풍류란 신명을 타고 노는 것이다. 신명은 근원적인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생명의 기운이다. 이 신명은 신바람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말 신(辰)을 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