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은 지금으로부터 4349년 전 상달 초삼일, 제1세 단군 ‘왕검’의 조선(朝鮮)건국을 대한민국 정부가 국경일로 지정한 날이다. 국조 단군 ‘왕검’으로 부터 마지막 47대 단군 ‘고열가’까지 조선을 2,096년 간 통치해 오신 분들이 ‘단군’이시다. 단군은 하늘을 대신하여 중심이 되어 무리를 이끌어 가는 군장이고 우두머리 지도자로 지금으로 말하자면 교황
흔히 우리는 스스로 ‘5천년 문화민족’이라고 하고, 자랑스러운 ‘단군(檀君)의 자손’이라고도 한다.우리를 이렇게 당당하게 하는 ‘국조 단군’은 누구인가?단군은 자연인의 이름이 아니라 지금의 교황과 같은 종교적, 정치적 최고 지도자의 직함이다. 지금으로부터 4349년 전인 1세 단군 ‘왕검(王儉)’으로부터 47세 단군 ‘고열가(高列加)’까지 2096년간을 이
보이지 않았다. 단군성전의 안내판이 없다면 찾을 수 없었으리라. 그것은 호텔수성(옛 수성관광호텔)이 법이산 앞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돌아서 100m 정도 걸어가야 국조를 만날 수 있다. 마치 사찰에서 인도의 석가를 모신 대웅전이 중앙을 차지하고 한국의 산신각이나 삼성각은 뒤편으로 밀려난 모습처럼 비쳤다. 대구는 250만 명이 살
국학의 길,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고, 한국인의 길, 우리 국학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있다. 우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출발점이 되는 단군조선에 이르게 된다. 그 이전부터 생성되어 단군조선시대에 정립이 되었던 우리 역사와 문화는 고유한 사유체계인 국학을 낳았지만 이천 년이 지난 시점에 일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정신문화적
나라사랑 인성교육전문기관 국학원은 지난 2002년 7월 창립했다. 2년 뒤인 2004년 6월 국학원 본원(충남 천안)을 개원했다. 하지만 인성교육에 대한 국학원의 역사는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국학원의 설립자 일지 이승헌 총장(글로벌사이버대)이 서른한 살이 되던 1980년 ‘나와 민족과 인류를 살리겠다’는 큰 사명감으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공원
천안(天安)은 하늘 아래 가장 편안한 곳이다. 유관순, 이동녕 등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이다. 그러나 이곳은 한민족 5천년 역사를 만날 수 있어 주목받고 있다. 2008년 10월 국학원이 19만 8천㎡(6만 평) 규모로 개원한 한민족역사문화공원이 그것이다. 뒤로는 흑성산(黑城山, 495m)을 배경으로 한다. 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독립기념관이고 서쪽
혼났다. 단군 앞에서 참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 어디서 한단 말인가? 국조전 바깥에 멍석을 깔았다. 단군 앞에서는 분향만 하고 내려왔다. 이 동 단민회 전 회장(20대)은 “부모님 문안 인사할 때도 밖에서 하는데, 어떻게 감히 (단군) 영정 앞에서 할 수 있느냐”라고 말했다. 이기환 단민회 사무국장은 단군은 황제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옛날 임금
이제호 회원(67세)은 지난 1998년 국학원의 통일국조단군상 건립운동에 동참하면서 국학원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단군상 369기를 세우면서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국조 단군의 뜻을 알게 되었다. 나와 민족과 인류를 위한 길을 인생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제호 회원은 전기소방통신 관련 회사를 운영하면서 소득의 일부를 국학원에 후원하고 있다
경이로웠다. 아니 신비했다. 어떠한 표현을 써야 할까? 고민될 정도다. 지난 11일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만난 2개의 석장승 이야기이다. 왼쪽은 왕검(단군)이고 오른쪽은 환웅이다. 한자로 이름까지 새겼으니 단군문화의 실체가 분명하다. 돌을 만지니 수백 년의 역사가 전해지는 듯했다. 지난해 대전 단묘에서 환인, 환웅, 왕검(단군) 석상을 취재한 적이 있다. 그
“유림들이 외국의 공자를 모시고 제사 지냈어요. 우리의 국조인 단군의 사당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유림들이 돈을 모아서 지었어요. 제사도 자체적으로 하다가 옥구향교가 문화재가 되면서 시에서 보태줍니다.”김조현 군산 옥구향교 전교는 단군전 건립의 역사를 이같이 말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군산의 유림들은 대한민국의 유림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