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관장 임원선)은 21일(금) 오후 2시 디지털도서관 대회의실(B3)에서 한국서지학회(회장 김동환)와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번 학술대회는 지난 9월 신설된 고문헌과에서 전국 규모 학회인 한국서지학회와 공동으로 손잡고 서지학 등 관련 연구 성과를 공개 발표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주요 발표내용으로는 △『직지』복원을 위하여 직지활자와 다양한
경제학 박사의 지위를 버리고 한글운동에 ‘헌신’독립한 날이 올 것을 한얼님의 이치로 여겨 이극로(1893-1978)는 자신의 호를 우리나라 사람이 골고루 잘 살아야 하겠다고 해서 고루라고 했고, 조국 광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고 해서 물불이라고 했다. 그는 1893년 경남 의령에서 출생하여, 1910년 마산 창신학교를 거쳐, 1912년 망명길에 올라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총장 이승헌, 이하 UBE) 국학연구원(원장 조남호)은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술동 예인홀에서 홍암 나철 서거 100주년과 선교 창립을 기념해 ‘한국선도의 하느님’을 주제로 제30회 국학연구원 학술대회를 개최했다.제1부에서 조남호 교수(UBE)는 ‘대종교의 신관’을 주제로 발표했다. 조 교수는 “〈대종교의 삼신일체론〉을 보면 대종교가 환인·환웅·단군이 세 신이 하나라고 하는 사고를 견지하였다” 라며 “대종교는 각기 조화주·교화주·치화주가 하나라고 봄으로써 종교적으로 원만한 교리체계를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연결하다개천절을 민족의 축제이자 세계적으로 추모해야 이윤재(1888-1942)는 본관은 광주, 호는 환산(桓山), 한메, 한뫼, 한산이다. 여기서 환산이나 한산은 모두 환(桓)인 환웅 환검에서 온 것으로 큰 산, 밝은 산을 뜻한다. 그의 단군에 대한 애정을 알 수 있다. 1888년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부 이용준과 모 이임이 사이에서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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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산(淸平山, 779m)만큼 아름다운 곳도 없으리라. 강원도에서 금강산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여행기록이 남겼기 때문이다. 김상헌의 《청평록》, 박장원의 《유청평산기》, 서종화의 《청평산기》 등이 있다. 조선의 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7대 명소 중의 하나로 지목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일명 경운산(慶雲山)이라고 한다. 부의 동쪽 44
개천절 행사에 적극참여국립 서울대학교에서 쫓겨난 사연? 이병기(1891~1968)의 호는 가람, 본관은 연안이고, 전북 익산 출생이다. 국민 애창곡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로 시작되는 ‘별’의 작사가이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로 끝나는 ‘난초’의 시조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는 한글운동과 학교
신운용 박사(사학,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는 최근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이 펴낸 등재학술지인 《선도문화》 제20권에 〈규원사화 연구성과와 과제>라는 제하의 논문을 게재했다. 코리안스피릿은 국학연구원과 신 박사의 허락 하에 논문 전문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규원사화》는 한국선도의 대표적인 사서이지만, 위서논쟁의 시비도 컸다. 이에
악랄하다. 일제의 조선말살정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산의 정기(精氣)를 끊는다고 말뚝을 박는가 싶더니 독립군 회의장소로 썼다고 소나무를 죽이고. 도대체 무슨 악뇌(惡腦)인지? 조선을 짓밟는 정보만 가득한지 모르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생가 앞은 일제가 세운 철길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정열모(鄭烈模, 1895-1967) 본관은 장기, 호는 백수(白水), 충북 회인출생이다. 그의 생애를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의 학자적 생애이다. 그는 경성보통고등학교 입학하였고, 1921년 일본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부 국어한문과 입학하였다. 1925년 졸업하고, 중동학교 교원이 되었으며, 1931년 김천보통학교 교무주임을 거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