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전라북도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땅이다. 120년 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이 극에 달한다. 전봉준은 탐관오리의 횡포에 맞서 농민군과 함께 혁명에 나선다.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주성을 점령한다. 이에 조정은 외군(청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인다. 수십만 명의 농민
충격이었다. 이시영 초대 부통령(李始榮, 1869∼1953)의 단군영정이 있는 곳이 맞나? 묻고 싶었다. 3일 개천절에 익산시 단군성묘를 찾았다. 이날과 어천절을 제외하면 문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의 시계는 1951년 이후 멈춘 것 같았다.단군성묘의 어제와 오늘“도지사, 시장, 경찰서장, 사람이 많았지. 다 왔어. 그때는 어마어마했지. 지금은
곡성군민에게 올해 개천절은 특별하다. 이 고장 출신 독립운동가 백당 신태윤 선생이 단군성전을 설단 한 지 100주년이 되기 때문이다.김학근 국조단군곡성숭모회 대표이사(곡성문화원장, 79)은 오는 10월 3일 개천절에 맞춰서 기념행사를 치른다고 밝혔다. 때맞춰 백당 기념관도 한옥으로 지었다."개천절에는 다문화 가정을 100여 명 초청할 계획입니다. 그들에게
지난 13일 곡성군 단군성전을 찾았다. 서울에서 곡성까지 기차로 2-3시간이면 된다. 이어 성전까지 1.6km다. 택시를 타거나 걷는 것이 낫다.이강오 전북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곡성 단군전은 충남 작산 단군전, 서산 와우리 단군전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현장에서 받은 안내 책자는 최초의 단군전 사진이 눈에 띄었다. 1914년 두루마
지난달 31일 전라남도 해남단군성조영모회(회장 박기철)를 찾았다. 사무실(해남읍 수성2길 11-5)은 해남종합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이었다. 이곳에선 영모회라는 이름보다 수성회로 통한다. 마을이름이 수성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로당이기도 하다. 박기철 회장은 “영모회가 수성회이고 수성회가 영모회”라고 말했다. 이날 영모회에서 가장 먼저 보여준 것
육지의 끝이다. 지난달 31일 전남 해남군을 찾았다. 이곳에 구월산 삼성사에서 가져온 단군영정이 있기 때문이다.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우리나라가 ‘삼천리 금수강산’인 이유를 “해남 땅 끝에서 서울까지 천리이고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가 2천리”로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 이곳을 남쪽 기점으로 둔다. 군 단위로는 해남의 땅이
지난달 8일 단묘를 찾았다. 이곳의 관리는 조금상 씨(59)가 맡고 있다. 그는 조병호 선생(1914∼2005)의 손자이다. 지난해까지 교직원으로 근무했고 올해 정년퇴임을 했다고 한다.단군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그는 ‘단군’을 찾고 싶다는 내게 이름부터 정정할 것을 요구했다. 고조선을 건국한 이는 단군(檀君)이 아니라 단제(檀帝)라는 것이다. 그의
대전은 미래도시다. 대덕연구단지와 과학 인재들이 모인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가 있다. 1993년에는 세계박람회인 엑스포를 개최했다. 서울에서 KTX로 1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잘 닦인 도로와 아파트, 이곳에서 ‘단군(檀君, Dangun)’을 찾을 수 있을까?충청도 단군문화를 찾기 위해 증평군, 청원군, 충주시, 공주시, 부여군, 서산시, 논산시 등 7곳
주역의 대가, 야산 선생이 창운각에 시주한 이유?부처가 아니라 단군을 신앙의 주체로 봐야! 지난달 26일 논산에서 만난 개태사는 일반 사찰과 달랐다. 정문에서 개태사 오층석탑 너머로 창운각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중앙이었다. 보통 사찰의 중심은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이 아닌가? 그런데 단군을 모신 창운각이 중심이었다. 개태사를 중창한 김광영(金光營, 188
“가야산 둘레 열 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한다. 토지는 기름지고 평탄하며 넓다. 물고기와 소금이 넉넉하여 부자가 많고,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도 많다. 서울 남쪽에 있어서 서울의 세력 있는 집안치고 여기에 농토와 집을 두고 근거지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다.”조선시대 최고의 지리학자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에서 서산을 비롯한 내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