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국민은행(은행장 이재근)과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독립유공자 후손의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대한의 보금자리' 2호 주택을 헌정했다고 1월 20일 밝혔다.'대한의 보금자리'는 노후 주택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의 주거환경을 개선해 안정적인 주거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캠페인이다. 대한의 보금자리 2호 주택은 전남 목포에 있는 고(故) 이정오 애국지사 외손녀의 주택을 개보수했다. 고(故) 이정오 애국지사는 전남 광주농업고등학교에 재학중에 '광주 학생 항일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이 주택은 20년이 넘는
“나는 적성(赤誠,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적국의 수괴(首魁, 우두머리)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1931)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 한인애국단 앞”대일항쟁기 항일투쟁 역사에서 전환점을 마련했던 이봉창 의사(1900~1932)의 일명 ‘동경의거’에 앞서 이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제1호 단원으로 입단하면서 썼던 선서문의 내용이다.이봉창 의사의 선서문이 10월 31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예고 되었다.‘동경의거’는 1932년 1월 8일 도쿄 연병장에서 육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 ”로 시작하는 가곡 의 첫 소절이다. 한때는 한국인이라면 이 가사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졌던 시기가 있었다. 가곡 는 1절만 윤해영 작사이고, 2·3절은 후에 작곡자 조두남이 작사했다고 한다. 1절이 자주 불려서 2·3절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 였다. 1980년대까지는 널리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에 나오는 지명 때문에 만주, 특히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리하여 1980년대까지 매우 자주 불리던 노래였다. 가
1920년대 만주에서의 무장 항일투쟁을 주도하던 대종교는 1930년대 초까지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김교헌(金敎憲)・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佐鎭)・정신(鄭信)・김혁(金赫) 등 주요 지도부들을 잃었다. 또한 다수의 지도부가 일경에 체포되어 지도부의 부재, 교세의 약화로 1930년대의 대종교 항일운동은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대륙침략을 감행하였다. 조선을 병참기지화하고 미곡을 강제 공출 하는 등 경제적 수탈은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경제적・인적 수탈과 더불어 민족말살을 획책하는 황국신
20~30대 젊은 나이에 광복군에 투신, 조국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우다 전사·순국한 뒤 서울 수유리에 안장된 한국광복군 선열 17위의 국립묘지로 이장을 8월 11일 시작했다.국가보훈처는 제77주년 광복절을 맞아 8월 11일(목)부터 14(일)까지 나흘간의 일정으로 수유리 한국광복군 합동묘소에 있는 광복군 선열 17위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다.‘다시, 대한민국! 영웅을 모십니다’라는 주제로 추진되는 이번 이장은 묘소 개장부터 임시 안치, 국민 추모·참배 기간 운영, 합동봉송식 및 합동안장식의 순으로 진행된다. 먼저, 11일(
선도사학은 대종교와 함께 역사 무대에 다시 등장하였는데, 뜻밖에도 대종교와의 관련성이, 독립투쟁을 한 민족사학자(대종교사학자)들을 ‘제국주의적 경향을 지닌 국수주의자’라고 폄훼하는 평가로 이어지고 있어 주목된다. 민족주의를 국수주의라고 매도하는 인식은 손진태로부터 비롯되었다.한영우에 의하면, 손진태는 ‘바로 이러한 (청일전쟁 이후 1920년대까지의) 구(舊)민족주의는 애국적・군국주의적・제국주의적’인 것인데 그 바탕에는 센티멘탈리즘적인 것이 깔려 있다고 보았고, 그의 신민족주의는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민족주의를 반대하였다고 하였다.
조성우 저 《고철 정철수 평전 격랑만리》(도서출판 큰길사, 2022)는 경기도 용인 묘현 능원에서 1924년 1월 16일 포은 정몽주 선생의 23대 종손으로 태어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강제로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갔다 학병 탈출 1호가 된 고철(高哲) 정철수(鄭哲洙) 선생의 격랑의 생애를 집대성한 책이다.이 책을 쓴 조성우 저자는 《KAIST-IP CEO》, 《서양득이 답이다》, 《길 없는 길》, 《행복한 덕질》 등 다수의 평전과 기록물을 집필했다. 조성우 씨는 정철수 선생의 아들인 정래정 씨의 의뢰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발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영화 ‘봉오동전투’에서 역사가 사마천의 말을 빌어 독립투사의 심정을 표현한 대사이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에 따라 죽음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이다.일제에 맞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의 온 삶을 불태운 독립운동가들의 죽음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그 무게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다. 광복 77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사에서 불꽃으로 살다간 이들의 역사가 제대로 조명되고 있는지 이동언 박사를 만나 들어보았다.40여 년간 독립운동사를 연구해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대일항쟁기 동제사(同濟社)에 가입,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갑·한흥교·민제호 선생을 2022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독립기념관은 2022년 7월의 독립운동가 김갑, 민제호, 한흥교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7월 1일부터 31일까지 한달동안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개최한다. 김갑 선생 사진 등 10점을 전시한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1912년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5월 31일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일항쟁기 한인애국단에서 일본군 고위 관료 처단을 위해 군사교육과 의열투쟁을 주도한 안경근·이덕주·최흥식 선생을‘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한인애국단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면서 침략의 원흉인 일본군 주요 인물을 처단하기 위해 1931년 김구 선생 주도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결성된 단체이다.안경근 선생은 안중근 선생의 4촌으로 1896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1918년 국내에 가족을 모두 남겨두고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망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