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가 없었다. 밀양시 천진궁(天眞宮)의 안내판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1957년에 대대적인 수리와 함께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문을 만덕문(萬德門)이라 하였다"라는 대목이 그렇다. 누가 수리를 했고 이름을 바꿨단 말인가? 천진궁은 국내 3대 누각 중의 하나인 보물 제147호 영남루 앞에 있기 때문에 찾기는 어렵지가 않다. 관광객도 자주 들
혼났다. 단군 앞에서 참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 어디서 한단 말인가? 국조전 바깥에 멍석을 깔았다. 단군 앞에서는 분향만 하고 내려왔다. 이 동 단민회 전 회장(20대)은 “부모님 문안 인사할 때도 밖에서 하는데, 어떻게 감히 (단군) 영정 앞에서 할 수 있느냐”라고 말했다. 이기환 단민회 사무국장은 단군은 황제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옛날 임금
역사는 사람이 만든다. 단군조선 이래 5천 년 역사를 잇는 것은 후손에게 달렸다. 전라남도 화순군 국조전은 강동원 씨(화순국조숭모회 명예회장)의 정성으로 일궈낸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 그는 화순 출신으로 광주에서 남도한약방을 경영한다. 그동안 화순에 관한 역사와 문화를 다룬 책만 10권이 넘게 펴냈다. 전남문화상도 받은 대표적인 향토사학자이자 철학박사다.
지난달 14일 전라남도 진도 단군전을 찾았다. 이날 아침 7시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4시간 만에 목포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조은세 전남국학원 사무처장의 차를 탔다. 조 처장도 오랜만에 방문하는 것이라고 했다. 성전 앞에 통일기원국조단군상이 있어 ‘세신’ 활동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조 처장과는 2010년 12월 이후 4년여 만에 만났다. 당시 뇌교육
수성사 단군전은 2011년에 건립됐다. 4년이 채 되지 않는다. 전국 단군전 가운데 나이로 비유하면 가장 어리지 않을까 생각됐다. 홍익인간의 가르침수성사란 임금의 장수를 위해 세운 사당을 말한다. 조선 중종 33년(1538년)에 객사(현재 동무리 영암군청) 옆에 건립됐다. 주로 영암 원로들의 의견을 나누는 장소로 이용됐다. 그러다가 대일항쟁기 때 남풍리로
“수십 년 동안 주민들이 계를 조직해서 단군제를 지냈어요. 음력 3월 15일에 제사만 합니다. 옛날에는 3개 면이 지냈고 (참석한 인원이) 100명도 넘었습니다. 지금은 2개 마을이 참여하고 있어요.”조성섭 양명마을 노인회장(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운봉리)은 단군전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3월 15일은 조선을 통치한 제1대 단군왕검이 하늘에 오른 날이다. 이
단군과 산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궁전이 아니라 산에서 맞이했기 때문이다.육당 최남선은 단군이 어천한 아사달산을 주목했다. 백두산, 금강산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은 생명이 탄생하고 돌아가는 곳이라고 봤다. 한마디로 거룩한 성소(聖所)인 것이다. 하지만 단군이 산에서 어떻게 맞이했느냐는 것은 사관(史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기술된다
단군을 모신다고 하면 종교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단군은 신(神)이 아니고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 그럴 때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공자님을 모시는 유학자나 부처님을 모시는 스님들이 단군을 모시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유학자나 스님들은 말한다. 종교 이전에 국조가 먼저라고.그런 점에서 전라북도 고창군 단군성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 10일 순창버스터미널 사거리에서 중절모를 쓴 노신사가 서 있었다. 흰 콧수염이 인상적인 양상화 단군사상선양회 이사장(83)이다. 양 이사장은 단성전 건립의 주역인 신학우 선생의 아들(신병식)과 고등학교 동창이다. 둘은 선대에 이어 선양회를 맡았다. 이후 친구가 고인이 되면서 양 이사장은 회장이 됐다. 그가 재임 시절에 ‘도덕교육관’을 지은 것은 순창에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고 한다. 위대한 일을 해도 그것이 후대에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잊히게 된다. 민족정신의 구심으로 전국에 단군전을 세운 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후손조차 만나기가 어렵다.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평균 나이 80〜90으로 고령이다. 이들마저 없다면 단군전을 누가 지킬 것인가? 지난 10일 서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