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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맹자(孟子)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왕이 군림했다. 군주가 권력을 한 몸에 쥐고 있는 왕조시대ㅡ군주가 위험에 처하면 왕조가 멸망할 수 있다. 그런 시대에 맹자는 공언했다. “백성, 사직, 군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백성이다.” 맹자가 이어 한 말
“나는 이등이 오는 것이 사실인가 확인하기 위하여 신문사로 이강李剛이라는 사람을 찾아갔네. 그러나 그 사람이 자리에 없어서 그냥 나오고 말았어. 나는 이등이 나타나면 거사를 해야 하겠다고 결심했어,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거사를 하려면 비용으로 쓸 돈이 필요했어, 내 주머니엔 친구로부터 변통한 여비 30여원과 권총 1정이 있었어.”권총은 부로우
나는 약지를 끊어낸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신분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1909년 3월에 포푸라치나야에 간 적이 있었네. 포푸라치나야는 수분하綏芬河로 알려진 곳이야. 그 후에 나는 한국러시아국경 가까운 곳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포의 교육에 힘쓰고, 강연에 힘쓰며 국민을 단합하려 애썼지. 당시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동지 2사람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서 하바로프스크(하발포河發浦)로 향했네. 기선을 타고 흑룡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갔어. 한국인 유지의 집을 방문한 뒤에 수찬(수청水淸) 등지에 이르러, 교육에 힘쓰기도 하고 혹은 사회를 조직하기도 하면서 각 방면을 두루 돌아다녔지. 어느 날 산골짜기에 들어섰을 때였어. 6,7명의 한인이 우리를
“내가 먼저 마을 집으로 내려가서, 밥도 얻고, 길도 물어 올 것이니, 숲 속에 숨어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시오.” 나는 말을 하고 인가로 내려갔네. 그러나 그 집은 일본 병정의 파출소였네. 일본 병정들이 횃불을 들고 나오므로 급히 몸을 피하여 산속으로 돌아왔지. “일본 병정이 지키는 파출소였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네. 우리는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이범윤의 부대 이외에 러시아 땅에 다른 의병부대는 없었습니까?” “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지로 활동한 해조계몽파海潮啓蒙派가 있었네. 1905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許發浦)를 무대로 러시아 볼셰비키와 함께 항일투쟁을 벌인 한인부대가 있었지. 이범윤의 부대는 1908년 2월부터 소부대 규모로 작전을 개시하여 일본군과 접전을 시도했어. 100명 단위로
나는 청년회가 들어있는 한 러시사식으로 지은 건물로 들어갔네. 몇 사람의 젊은이들이 한 방에 모여 있었지. 청년들은 이 고장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거나 조국이 일본과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을 맺은 후에 망명해 온 사람들이야. “한국에서 온 안중근이라 합니다. 청년회에 가입하고 싶습니다.” 나는 나의 이름과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밝혔지. “청년들이 매일
광주 송정1교-나주시계 간 도로확장공사구간 내 '광주 복룡동 유적' 무덤에서 중국 신나라(新, 8~23년) 화폐인 '화천(貨泉)'이 우리나라 최초로 꾸러미로 출토되었다.기원후 14년에 처음 주조된 화천은 후한 광무제가 '오수전(五銖錢)'으로 화폐를 통합한 기원후 40년까지 통용된 화폐로, 정확한 주조연대를 알 수 있고 통용 시기가 한정되어 유적의
“눈을 뜨셔요. 이제부터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날아갈 것입니다. 제가 할 일은 거기까지 태워다 드리는 일입니다.”안창남 비행사가 말하였다. 아니마는 내 집단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간 곳은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 야외의 풍경이 100년 이전의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자동차를 단 한 대도 볼 수 없었다. 자동차 대신에 말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