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檀君)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아직도 단군이 한 사람의 이름이라 하는 이는 없으리라 본다. 단군은 하늘을 대신하여 하늘 마음으로 국민을 다스리던 최고의 정치 권력자이자 하늘에 드리는 제사를 집전하는 최고 신관의 관직명이다. 지금도 몽골어, 만주어, 중앙아시아 소수부족, 터키어에서는 하늘을 ‘탱그리(TANGRI)’ 등이라 부른다. '단군'에서 비롯된
배달국말이 되면 염제 신농국과 백제 소호국의 세력 균형이 깨어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유망楡罔(신농국의 8세)이 백성들을 단속하고 다그쳐 민심이 돌아서고 제후들이 배반하여 중원지역이 극히 시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신농국이 패권주의적 지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인데, 이러한 혼란을 틈타 신농국의 유력가였던 공손公孫 헌원軒轅(후의 황제黃帝, 기원전 2550년~기
로 베일 속 단군을 역사로 끌어낸 행촌 이암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행촌 이암선생은 1297년에 출생하여 충선왕 5년, 1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충목왕 3년(1347년)에는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격인 '우대언(右代言)'이 되었고 11년 뒤(공민왕 7년)에는 오늘날 국무총리격인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과 참모총장격인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羅喆 선생의 속명은 나인영羅寅永이었다. 나철과 나인영은 이명동인(異名同人)이었는데 아는 사람이 드물다. 나인영이 아직 단군을 알지 못하고 대종교를 창시하기 전인 1905년 12월 30일 눈 오는 날 밤 11시경이었다.서울역에서 기차를 내려 남대문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어떤 머리가 하얀 노인이 나타나더니 “자네가 나인영이 아닌가.”
‘붉은 악마’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치우천황은 한고조 유방(BC247~BC195)이 전쟁에 앞서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모셨던 존재다. 중국에서도 무패(無敗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되고 있다. 치우란 ‘우레와 비를 크게 만들어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다. 치우천황은 우리 신시배달국의 14대 자오지 천황으로도 불리 우니 엄연히 우리 한민족의 직계 선조이다.
삼신산이라는 곳은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발해 한가운데에 있는데, 속세에서 그리 멀지는 않다. 언젠가 가 본 사람이 있었는데 여러 신선들과 불사약(不死藥)이 모두 거기에 있고 모든 사물과 짐승들이 다 희며 황금과 은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이르기 전에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구름과 같은데 막상 도착해 보면 삼신산은 도리어 물 아래에 있다. 배를 대려 하면 바
기원전 1891년 경인년에 단군조선 제11대 단군인 도해 단군(道奚檀君)이 즉위했다. 나라의 인재들이 모인 국자랑(國子郞)과 도해단군 태자의 스승이기도 한 국자사부(國子師傅)인 유위자(有爲子)는 도해 단군이 즉위하자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을 올렸다. 단군조선 시대의 국자랑은 나라의 왕족, 귀족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심신수련 교육기관으로 고구려의 조의(참
한국 상고 이래의 ‘선도(선교·신교·신도·천웅도·풍류도) 문화’는 근대 역사학의 성립 이래 최남선(1890~1957)의 ‘불함문화론’을 필두로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밝문화(배달문화, 불함문화, 광명문화)’의 관점으로 접근되어 오고 있다. ‘밝문화(배달문화)’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외물로서의 ‘밝음’이나 ‘해·달’ 등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작년 년 말, 국민들의 숨통을 조이듯이 싸우던 여야와 철도노조 파업이 간신히 봉합되더니 새해 들어서는 국사교과서 문제로 이내 온 나라가 시끄럽다. 한 나라와 민족의 삶에 대한 통찰은 그들의 철학이 되고, 그 철학이 이어져 오면서 나라의 흥망성쇠는 역사가 된다. 역사란 강자의 편에서 기록 되는 것이지만 변 할 수 없는 가치는 민중의 문화가 되어 저변기층으로
이야기 하나.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오늘날의 헌법과 같은 조칙, '개물교화경'을 통해 '천진조만율일상균부삼진(天神造萬人一像均賦三眞)'이라 했다. 하느님께서 만인을 창조하실 때, 몸과 마음과 정신이라는 세 가지 귀한 보물을 왕이나 귀족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골고루 주었다는 말이다. 고구려가 얼마나 평등한 철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나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