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의 길,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고, 한국인의 길, 우리 국학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있다. 우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출발점이 되는 단군조선에 이르게 된다. 그 이전부터 생성되어 단군조선시대에 정립이 되었던 우리 역사와 문화는 고유한 사유체계인 국학을 낳았지만 이천 년이 지난 시점에 일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정신문화적
지난 3일 서울 종로 보신각. 단기 4348년 개천절을 축하하는 타종식이 열렸습니다. 육중한 종소리는 마치 천지를 진동하듯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국학원 회원과 시민 1천여 명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습니다. KBS와 MBC 등 주요 방송에도 보도됐습니다. 하지만 한민족의 건국을 기념하는 이 날에 온 국민이 축하했을까요?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한글날을 맞이하여 일제시대 한글을 지켰던 분들이 생각난다. 주시경과 그에게서 직접 배웠거나 아니면 사숙한 제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한글학자인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단군을 믿었던 대종교인들이라고 하는 것은 잘 모르고 있다. 이들은 한글 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신문, 잡지, 강연 등을 통해 단군과 국학을 소개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비록 역사학자는 아
오는 9일 한글날을 앞두고 주시경을 비롯한 국어학자들이 국학과 정부수립에 이바지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조남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는 최근 동 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펴낸 에서 라는 연구논문을 통해 “주시경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정신을 보존해야겠다는 결심으로 기독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했다”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에 관한 일화는 손자 안경하 광복회 부산광역시 지부장이 전했다. 백산은 변장에 능했다. 일본 경찰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철저히 위장생활을 했다는 것. 때문에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는 여관에 숙박하실 때나 기차를 이용할 시 일본 옷차림에 금테안경과 단장을 사용, 1등 객실만을 골라 쓰며 일본인 행세를 했다고 합니다.” 첩
백산기념관은 부산역에서 멀지 않았다.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인 중앙역에 내리면 된다. 5분이면 닿을 거리다. 아침 10시에 문을 열기 때문에 9시부터 개장하는 부산근대역사관부터 들렸다. 이곳은 1920년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사용됐고 해방 후 미국 해외공보처 부산문화원이 되었다고 한다. 부산시민들의 반환요구로 문화원은 철수
경기도박물관은 광복 70년을 기념해 오는 23일부터 10월 25일까지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시회 '어느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개최한다.전시는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파주 출신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남파 박찬익(1884~1949), 임시정부 재무부차장 신건식(1889~1955)과 부인 오건해(1894~
“마고당이라고 아십니까?”“모르겠는데예.” 지난 17일 부산 해운대구 장산에 오르는 등산객에게 마고당을 물어보니 2명 중의 1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마고당은 대천공원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있지예”“감사합니다.” 장산 입구에서 폭포사, 양운폭포, 대천체육공원을 오르면서 마주친 안내판을 살펴보니, 시민들이 헷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고당과 천
본고는 한국선도가 광복 이후의 오랜 쇠퇴 국면에서 벗어나 1970년대말ㆍ1980년대초 이후 선도수련문화의 형태로 새롭게 활성화되는 양상을 고찰한 연구이다.광복 이후 서구화 추세 속에서 약화 일로에 있던 선도는 1970년대말·1980년대초에 이르러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서구화에 대한 반성적 분위기 속에서 동양명상법이 소개되었으며 이어 고유 전통으로서 한
경상남도 밀양에서 천제를 지낸 터는 찾을 수 없었으나, 천제를 올리자고 말한 이가 있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다. 그는 본관이 밀양으로 1382년 진사, 이듬해 생원이 되었고 1385년 문과에 급제했다. 1417년 대제학에 임명되면서 10년 동안 외교문서를 맡아 ‘명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그런데 태종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