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검인정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문제로 여야가 시끄럽다. 세월호 사건 이후 단 하루도 쉴 날이 없다 할 정도로 시끄러웠으니 이제는 좀 조용히 지냈으면 좋겠다. 그러나 교과서 문제가 갑자기 불거져 나와 나라 안이 또다시 시끄럽다. 우리 역사의 머리인 고조선이 망가지고 없다는 사실부터 챙겨야 할 일을 엉뚱한 곳에 초점을 맞추어 언성을 높이고 있다. 문제는 근
한글날을 맞이하여 일제시대 한글을 지켰던 분들이 생각난다. 주시경과 그에게서 직접 배웠거나 아니면 사숙한 제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한글학자인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단군을 믿었던 대종교인들이라고 하는 것은 잘 모르고 있다. 이들은 한글 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신문, 잡지, 강연 등을 통해 단군과 국학을 소개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비록 역사학자는 아
속아서 한평생이란 말이 있다. 누구나 속고도 속은 줄 모르고 한세상을 보낸다. 우리가 속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2000년 고조선의 역사를 잃고도 잃은 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병도에게 배운 강단사학자들에게 물어보아야 그들은 모른다. 차라리 소설가 이광수에게 물어보는 것이 낫다. 이광수는 일제 말기인 1942년에 소설『원효대사』를 썼다.
1. 임금의 청탁을 거절한 법관 정철송강이라고 하면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을 머리에 떠올리겠지만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의 한 사람이었다. 정철은 중종 31년 서기 153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남부끄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10살 때 아버지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백산기념관은 부산역에서 멀지 않았다.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인 중앙역에 내리면 된다. 5분이면 닿을 거리다. 아침 10시에 문을 열기 때문에 9시부터 개장하는 부산근대역사관부터 들렸다. 이곳은 1920년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사용됐고 해방 후 미국 해외공보처 부산문화원이 되었다고 한다. 부산시민들의 반환요구로 문화원은 철수
이병도 사학은 광복 후 학계와 정계 그리고 문화계까지 모두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병도 사학은 일제식민사학을 극복하는 데 충실하지도 않았고 충분하지도 않았다. 이병도 사학의 유산 가운데 가장 큰 덕목, 아니 죄목은 서기전 2333년에 단군이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삼국유사』 고조선 조의 기록을 사실이 아니라 신화라 한 것이다. 단군을 말살한 세력이 바로 일본
경상남도 밀양에서 천제를 지낸 터는 찾을 수 없었으나, 천제를 올리자고 말한 이가 있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다. 그는 본관이 밀양으로 1382년 진사, 이듬해 생원이 되었고 1385년 문과에 급제했다. 1417년 대제학에 임명되면서 10년 동안 외교문서를 맡아 ‘명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그런데 태종 1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전 세계를 돌면서 열리는 올림픽 기념식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성화(聖火)다. 대회 기간 활활 타오르는 불빛은 자국을 대표해서 뛰는 선수들의 열정처럼 빛난다. 우리나라도 올림픽이 열리면 단군의 아들이 쌓았다고 전하는 강화도 참성단에서 성화한다.밀양은 어떠할까? 매년 5월에 열리는 ‘밀양아리랑대축제’의 성화는 전야
천안(天安)은 하늘 아래 가장 편안한 곳이다. 유관순, 이동녕 등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이다. 그러나 이곳은 한민족 5천년 역사를 만날 수 있어 주목받고 있다. 2008년 10월 국학원이 19만 8천㎡(6만 평) 규모로 개원한 한민족역사문화공원이 그것이다. 뒤로는 흑성산(黑城山, 495m)을 배경으로 한다. 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독립기념관이고 서쪽
우리에게 본래 고유한 문화가 있었는가. 새로 무엇인가 나왔다 하면 모조리 위서(僞書)로 보는 풍토가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그런 풍토에서는 문화가 발전할 수 없다. 요즘 문학계에 표절 시비가 붙어서 한편 불쾌하기도 하지만 반갑기도 하다. 한 젊은 작가가 몰매를 맞는 것을 보니 시원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위서니 표절이니 하는 문제는 많은 독자를 속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