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존심 싸움 아닌 한류 콘텐츠의 막강한 영향력과 산업적 수익의 문제- 中 언론이 부추기고 中 학자가 논리 제공, 中 청년 누리꾼이 분노‧투쟁세계인이 열광하는 한복은 2021년 10월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에 ‘HANBOK’으로 영문 등재되고, 지난해 7월에는 ‘한복 생활’이 우리 국가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다. 또한, 올해 초까지 미국 조지아주를 포함 3개 주와 4개 도시에서 ‘한복의 날’을 지정‧선포했다.그런데 한민족이 향유‧계승해 온 한복은 물론 김치, 한지, 한옥, 삼계탕, 삼겹살 등 전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문화콘텐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하 공진원)는 2023년 KCDF 공예·디자인 공모 전시 개인작가 부문에 선정된 도예가 김혜정의 개인전 《살아 있는 순간들 - Palpable Moments》를 9월 6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KCDF갤러리 1전시장에서 개막했다.김혜정 작가는 물레기법으로 기(器) 형태를 만든 후 나무·돌·철사 등의 여러 물질을 활용해 변형한 작품을 통해 자신의 기억과 감정 등을 표현한다. 표면에 상처가 나고 형태가 일그러졌음에도 고고한 자태를 지닌 작가의 작품은 기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10여 년 전부터 이어온 작품 ‘심
수수현갤러리(경기도 광주)는 박계희 작가와 이미선 작가 초대전을 9월 4일부터 9월 26일까지 개최한다.수수현갤러리는 매달 회화와 조각 또는 공예를 콜라보로 전시한다. 이번 초대전에는 박계희 작가의 회화와 이미선 작가의 조각을 콜라보로 하여 회화와 조각 작품이 시너지가 날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박계희 작가의 작품은 휴식에서 시작한다. 혼잡한 도시를 떠나 만난 바닷가에서 작가는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었다. 작가의 작품에는 편안하지만 공간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자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극사실주의 기법은 관객에게 실제 생동하는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한국문화재재단과 오는 9월 7일부터 11일까지 프랑스 파리 노르빌팽트(Nord Villepinte, Paris)에서 개최되는 인테리어 박람회 에 참가해 국가무형유산 전승자들의 우수한 전승공예품을 선보인다. 메종앤오브제는 지난 1995년부터 시작된 유서깊은 세계 최대의 인테리어 박람회로, 2천300여 개가 넘는 기업이 참가하고 6만5천명 이상의 관계자와 관람객이 방문하는 대규모 행사이다. 국립무형유산원은 지난 2016년부터 참가해 한국 전통공예에 현대적
두산아트센터는 DAC Artist(두산아트센터 아티스트) 강현주(극작가ㆍ연출가)의 신작으로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를 9월 5일(월)부터 23일(토)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진행한다.《잘못된 성장의 사례》는 소도시 국립대학에서 식물의 저항성 유전자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교수 은주(이지현 분)가 운영하는 연구실에서는 식물 속에 존재하는 저항성 유전자를 찾고 있다. 연구실 초창기 멤버인 박사과정 혜경(류혜린 분), 오직 논문 통과에만 정신을 쏟고 있는 석사과정 예지(공예지 분), 식물학자가 될 꿈에 부푼 인턴
가을을 맞는 9월과 추석을 맞아 무형유산의 그윽한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무대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국립무형유산원은 9월 5일부터 10일까지 국립무형유산원 얼쑤마루 공연장에서 「2023 무형유산축전」의 일환으로 명인 초청 공연 「품다」와 제작공연 「탈생」을 개최한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과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이 공동주관하는 2023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공연시리즈 ‘위대한 유산, 오늘과 만나다’가 오는 9월 28일부터 10월 22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일원에서 펼쳐진다. 국립무형유산원은 오는 9월 10일까지 중정 야외
재단법인 아름지기는 2023년 의(衣) 문화를 주제로 한 기획전시 《blurring boundaries: 한복을 꺼내다》를 9월 2일(토)부터 11월 15일(수)까지 아름지기 통의동 사옥에서 개최한다. 본 전시는 한복 그 자체로부터 출발하여 형식에 갇혀 있던 과거의 한복을 오늘의 일상으로 꺼낸다. 작가 크리스티나 김은 우리 조상들이 오랜 시간 아름답다고 여기고 남겨놓은 것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바탕으로, 본래의 미감과 비례를 유지하면서도 충분히 현대 생활에 입기 편하고 관리하기 쉬운 방법을 찾고자 했다. 섹션은 한복의
가을의 길목에서 무더위와 장마에 지친 시민들이 국가무형유산의 진수를 음미하며 그윽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공연과 전시행사가 펼쳐진다. 국립무형유산원은 개원 10주년과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 2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2023 무형유산축전’의 개막식을 9월 1일 오후 4시에 국립무형유산원 중정에서 개최한다. 국립무형유산원은 또 한국문화재재단과 함께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을 맞아 와 를 전국 각지에서 개최한다. 국립무형유산원은 이와 함께 2023년 국가무형유산 보유자작품전 「전승의
(1편에 이어) 한국 연예인의 한복 차림, 갓‧봉잠 등 장신구 착용에 댓글 테러를 일삼는 중국 누리꾼의 행태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들은 한복이 명나라 ‘한푸’에서 기원이라며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는데 정작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드레스 패션 〈마미군〉이 유행했다. '한궁춘효도' 속 한나라 여성의 의상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마미군이 한복의 고유한 특징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전통 복식양식과 차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고대 한나라부터 당, 송, 명, 청을 거쳐오면서 여성 의복의 선은 대부분 에이치(H)라인이었다. 하늘하늘하게 몸을 감싸거나 몽골 의복처럼 어깨에서 아래로 무겁게 떨어지는 에이치 라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일본의 여성 의복 또한 하의를 풍성하게 부풀리는 패션은 유행하지 않았고 비슷한 시기 베트남 등 동남아의 여성 패션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한복은 여러 변화를 거치면서 상의는 작고 가벼우면서 꽉 조이도록 입고, 하의는 풍성하게 부풀려 달항아리와 같은 볼륨감과 곡선미를 최대한 살린 상박하후(上薄下厚) 패션이 거듭 도래했다. 조선시대 한복 형태의 변천(출처 '조선시대 여인의 멋과 차림새' 단국대학교 출판부). 동북아역사재단이 지난해 음식문화에 이어 올해 한복과 관련한 한중 문화충돌을 주제로 7월 22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과 공동으로 ‘한국의 옷과 멋’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명나라의 조선 드레스 열풍과 조선 전기 여성 한복’을 주제로 마미군 연구를 발표한 구도영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발표 중 “서구에서는 르네상스를 지나 15세기 이후 치마폭이 넓은 드레스가 주를 이루었다. 특히, 19세기 유럽에서는 한껏 부풀린 드레스를 입기 위해 말총으로 만든 페티코트인 ‘크리놀린(Crinoline)이 등장했다”며 “동아시아의 말총 페티코트는 조선에서 탄생했다. 아시아에서 유행한 패션이 400년 후인 19세기 서양에서 대유행을 한 셈”이라고 했다. 만약, 중국 누리꾼이 주장하는 기원론 내지 원조론을 적용하면, 조선의 마미군이 서양의 말총 페티코드, 크리놀린의 기원인가? 19세기 구미 여성의 의상 (미국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구도영 연구위원은 강력하게 “이는 동서양과 시대를 관통한 동서양 복식의 문화사적 보편성일 뿐”이라고 정의했다. 즉, 문화가 한 지역에서 발생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 간다는 전제하에서 제시한 ‘문화전파론’ 이론의 커다란 구멍을 지적한 것이다. 이번 학술회의 기획자인 구도영 연구위원은 문화전파론을 기반으로 중국 누리꾼이 주장하는 ‘중국 기원론’ 내지 ‘중국 원조론’의 모순과 맹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중국은 한국에 대해 문화원조를 자처하지만, 중국이야말로 사실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문화수용자였다. 미국을 상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라며 “중국은 주변국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문화를 성장시킨 아시아의 제국이었기 때문에 문화원조를 강조하게 되면 사실 중국 문화라는 것은 거의 사라지게 된다”고 역설했다. 구 연구위원은 “예컨대 《시경》에서 ‘저’에 대한 기록이 등장했으니 한국 김치는 중국이 기원이라 주장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한국 김치의 원류는 기록이 더 이른 시기에 확인되는 메소포타미아라 할 것이다. 또한, 중국이 문화주권을 주장하는 성리학조차 중국 고유의 학문이 아니라 인도의 불교 문화 유입 때 만들어진 ‘하이브리드 유학’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라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이해를 도왔다. 설명을 덧붙이면 성리학의 발생은 다음과 같다. 진시황제에 의해 유학 서적들이 모두 불태워진 분서갱유焚書坑儒사건 이후 유학은 옛 유학 경전의 문장을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훈고학이 주류를 차지했다. 성리학은 획일적인 훈고학에 대한 반발로 생겨났다. 당나라 말기 불교를 비롯한 도교 등에서 여러 형이상학적 요소를 차용해 발생한 신유학 성리학은 송나라 이후 주류를 이루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달 22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과 공동으로 '한국의 옷과 멋'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현재 중국 사회에 널리 확산한 문화 인식은 중화 문명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문화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일방향으로 흘렀다는 경향이 짙다. 이러한 인식은 서구 제국주의와 사회진화론이 풍미했던 19세기 말 통용되던 문화이론 ‘문화전파론’을 근저에 두고 있다. 주류학계는 문화를 우열로 구분할 수 없다는 문화상대주의가 100년 가까이 논의되며 모든 문화는 섞이고 융합되었다는 연구가 심화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물론 아시아 학계에서는 여전히 ‘문화전파론’에 기반한 시각이 적지 않다. 문화를 포함한 전파이론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인간사회도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된다며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진화이론과 더불어 강대국이 약소국을 식민지로 삼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된 이론이다. 중국은 아시아의 제국을 자처했지만 전파이론이 풍미하던 시기 서구 제국주의 동진東進에 따라 충돌한 아편전쟁으로 영국, 프랑스 등 서구열강에 수도를 빼앗기고 홍콩 할양을 포함한 불평등조약, 난징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
명나라 초기 수도인 남경(소주지역)에서 유행한 조선의 '마미군'패션. '명헌종원소행락도'를 통해 황궁의 궁인들이 마미군을 입어 하의가 우산처럼 퍼진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 조선 전기 무려 폭 5.5m(아파트 2층 높이) 치마 ‘마미군’패션 짐작 “〈마미군〉은 조선에서 시작되어 경사(京師, 남경)로 유입되었다. 경사 사람들이 사서 입었으나, 아직 이를 직조할 줄 아는 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부유한 상인과 귀공자, 기생들만 입었는데 이후 무신들도 많이 입었다.” 15세기 중후반 당시 명의 수도 남경(소주 일원)에서 조선의 옷이 크게 유행했다는 명나라 관료 육용(1436~1497)의 문집 ≪숙원잡기≫의 내용이다. 하지만 육용은 명나라의 ‘강남 스타일’이 되어버린 마미군 패션이 몹시도 거슬렸나 보다. “(마미군을) 입은 사람이 날로 많아져서, 성화 황제(명 헌종, 재위 1464~1487) 시기 말에는 조정 관료들도 많이 입었다. 아랫도리에 허황되고 사치스럽게 옷을 입는 자는 예쁘게 보이고자 할 뿐”이라며 각로, 예부상서의 실명까지 일일이 거론하며 비꼰다. 또한, “어린 후작과 백작, 부마 중에는 활시위로 옷자락을 꿰어 입는 자까지 있었다. 대신 중 마미군을 입지 않는 이는 이부시랑 여순 한 사람뿐이었다”고 했으니 명 황실까지 점령한 마미군의 위세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렇듯 황제의 성 안팎 부유층을 강타한 조선의 드레스 패션은 명 정부가 대단히 우려할 만한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부유층의 사치는 물론 군수품인 관청 군마의 갈기와 꼬리털까지 잘라가 군마 공급에 차질을 빚었다고 한다. 명대 학자 풍몽룡이 집성한 《고금담개》의 내용이다. 결국, 홍치제(재위 1487~1505) 초기 마미군 착용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난 후에도 명의 패션 도시 소주지역에 살았던 남경사람들은 북경 거리에서 마미군 패션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명대 학자 심덕부(1578~1618)의 《만력야획편》에 명나라 관료들이 즐겨 입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들이 후안무치했다”고 비판했다. 마미군은 말총으로 만든 속치마로, 대슘치마를 상상하면 된다. 사진 담인복식미술관 소장. 그럼, 원나라 간섭기에 원 황실을 비롯한 귀족, 상인 등을 사로잡은 고려의 패션 ‘고려양’에 이어 곧바로 명나라를 강타한 〈마미군〉은 도대체 무엇일까? 마미군은 말총, 즉 말의 갈기와 꼬리털을 직조해 만든 속치마로, 서양의 페티코트(petticoat)처럼 하의를 부풀려서 가벼우면서도 풍성하고 자연스럽게 퍼지도록 만드는 기능을 했다. 이를 입으면 겉옷이 우산처럼 퍼진다고 했는데 〈명헌종원소행락도〉 그림 속 궁인들의 차림을 보면 남녀 모두 치마와 겉옷 하의 부분이 우산처럼 부풀어있다. 동북아역사재단 구도영 연구위원은 “주로 육지와 멀리 떨어져 면포를 구하기 어려웠던 제주에서 면직물 대신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말의 털을 이용해 직조한 것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한복의 속옷 중 모시에 풀을 먹여 제조하는 ‘대슘치마’를 상상하면 된다”고 했다. 지난 7월 22일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한국의 옷과 멋' 학술회의에서 발표하는 구도영 연구위원.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그런데 명나라 사람들을 그토록 사로잡은 마미군이 정작 주산지인 한국에서 한복의 일부로 전하진 않는다. 짐작하건대 조선문화의 핵심지역인 수도 한양 등과 멀리 떨어진 섬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제품인 데다가 이를 충분히 대체할 직물이 있는데 굳이 구하기 어려운 말총으로 만든 제품을 선호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한편, 국내에서도 마미군 패션을 짐작할 기록이 나온다. 당시 조선에서는 말총 옷을 ‘종의鬃衣’라고 불렀다. ≪성종실록≫에 특진관 유자광이 1490년 “제주에서 수령들이 불법적인 일을 많이 하는데 종의를 짜기 위해 마미(馬尾, 말의 꼬리털)와 마렵(馬鬣, 말의 갈기)을 다 잘라가 거의 다 없어졌다”는 보고내용이 나온다. 명나라에서 발생한 일이 조선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유자광은 “최부라는 사람이 풍랑으로 제주에서 중국(남경과 가까운 해안)으로 표류했는데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이 ‘종의를 가지고 왔는가?’ 묻고는 없다고 하자 ‘전에 (제주에서 온) 이섬은 종의를 많이 팔았는데 너만 없는 걸 보니 가난한 유생이구나’라고 했다”는 내용까지 전하며 “강력하게 종의를 금지해야 한다”고 읍소했다. 마미군 패션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 1500년대 경기도 양주의 남양 홍씨 묘에서 발굴된 한복 복원품. 치마 폭이 550cm 아파트 건물 2층 높이로, 이런 치마를 입기위해 가벼우면서 볼륨감을 살려줄 속옷이 필요했다. 사진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또한, 마미군 패션을 짐작할 조선의 유물도 있다. 경기도 양주 남양 홍씨 묘에서 출토한 한복을 복원하면 치마의 폭이 5.5m로 아파트 건물 2층 높이와 맞먹는다. 이런 치마를 끌리지 않게 입으려면 가벼우면서도 볼륨감을 살려줄 속옷은 필수였던 것이다. 현재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한 복원된 거들치마를 보면 치마 앞을 접어 올렸고, 치마의 앞면은 95cm, 뒷면은 129cm로 19세기 서양의 화려한 드레스 패션과도 견줄 만하다. (2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