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이틀째, 경남 산청의 한 펜션에서 하룻밤 머문 천손문화연구회 답사팀은 아침 6시 금관가야의 마지막왕인 구형왕의 왕릉을 보기 위해 출발했다. 답사버스로 10여 분 거리에 구형왕릉이 있었다.12월 한겨울의 아침이라 해가 뜨지 않아 캄캄했고, 눈 대신 겨울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어스름이 조금씩 사라지며, 크고 작은 자연석으로 촘촘히 쌓은 7층 피라미드인 구형왕릉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 높이는 11.15m로, 국내에서는 유일한 적석 피라미드이다.완만한 산 비탈의 경사면을 따라 쌓은 왕릉 하단은 매우 넓고 4단부터는 급격히 좁아
가야문화 답사팀은 대가야 고분에서 발길을 돌려 대가야왕릉박물관(경북 고령군 대가야읍)에 들어섰다. 발 아래 지산동 고분 내부가 펼쳐졌다. 돌덧널무덤 안에는 왕의 무덤인 으뜸덧널과 왕이 저승에서 사용할 식량과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인 딸린덧널, 그리고 순장덧널들이 있었다. 주변에는 대가야 토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원통모양 그릇받침을 비롯해 고분에서 발굴한 부장품들을 전시했다.이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대가야가 400년대 후반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각형 삼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고 뱀 모양의 세로장식 띠가 붙어
보물로 지정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국보로 승격된다.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보물 제525호 삼국사기」, 「보물 제1866호 삼국유사」등 3건을 국보로 승격 예고하고,「김홍도 필 마상청앵도」등 8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하였다.『삼국사기』는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삼국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官撰史書, 국가 주도로 편찬한 역사서)로서, 국보 지정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물 제525호 「삼국사기(三國史記)」(1970.12.30 지정)는 1573년(선조 6
지난 19일, 서울시청 시민청 지하2층 워크숍룸에서 제173차 국학원 정기 국민강좌가 열렸다. 이날 강좌에는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융합고고학과 교수가 ‘부여와 백제 및 가야와의 연관성 검토’에 관하여 강연했다. 이 교수는 부여에 관한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한국사에서 부여가 지닌 역사적 위상은 높다고 주장했다.“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여의 별종(別種)으로 불려졌다.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한 세력은 부여로부터의 유이민이었다. 이 점은 개로왕이 북위에 올린 상표문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백제 왕실의 성인 부
“왜 고조선이 역사가 아닙니까?” “곰이 어떻게 사람이 되냐?” 올해 초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있었던 학생과 교사의 대화이다. 도대체 우리는 우리 민족의 기원으로 삼은 고조선과 국조라 칭하는 단군, 그리고 홍익정신을 어떻게 교육하고 있는가.부산지역 한 중학교 국사교사는 “(검정 교과서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문장이 생략되어 있고, 다만 단군의 건국이야기가 우리민족의 위기 때 민족의 단결과 위기극복에 도움이 되었다는 정도만 언급되어 있다.”고 했다. 경기도 부천의 초등교사는 “단군의 건국은 실제라고 지도하고 있지만, 삼국유
[ “가야사 조명, 임나일본부설 파헤치는 학술발표]주제발표에 나선 황순종 연구가는 를 저자로, 와 속 가야의 기록을 조명하고, 일본 식민사학자가 주장한 가야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과 이를 옹호하는 현재 국내 학자들의 비합리적 논거를 하나하나 반박했다.단적인 예로 에는 서기 8세기에 생긴 ‘일본’이라는 국호가 3세기에 등장하며, 임나가 자국 영토 내 역사라면 ‘임나 열전’이라도 있어야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위치에 관해서도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있다”는 기록만으로 현 경상도
우리 역사상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함께 500년 이상 존속했다. 그러나 시간적 공간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가야는 그에 걸맞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교육과 연구에서 소외되어왔다. 가야사를 조명하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임나일본부설을 파헤치는 학술적 발표가 있었다.사단법인 국학원이 지난 28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가야문화 복원을 통한 식민사관 극복’을 주제로 제36회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국학원은 한국 상고사 및 고대사와 홍익정신문화 복원을 위해 매년 학술회의를 개최해왔다.이날 국회교문위원장인 유성엽 국회
이중화(李重華, 1881-?) 호는 동운(東芸), 서울 출신, 아버지는 이용주(李容疇), 1899년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교(興化學校) 영어과에 입학하였고, 1903년 졸업 후 다음해 이 학교 교사를 지냈다. 1910년 배재학당에서 영어교사를 하였고, 이 때 한글교사를 하던 주시경을 만났다. 한글에 관한 관심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19년에는 독립선언문
《삼국유사》 연오랑ㆍ세오녀와 비슷한 이야기가 동해 바다를 건너 일본 역사 기록에도 등장하니, 그 주인공이 바로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 아메노히보코)과 그 아내 ‘赤玉女(아카루히메, 阿加流比賣, 赤留比賣)’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비롯하여 일본의 향토 기록인 《번마국풍토기(播磨國風土記)》, 《비전국풍토기(肥前國風土記)》,
앞서 이즈모 일대의 야요이 유적·유물 분석을 통해 스사노오에 의한 초기 문명 개척 과정, 또 B.C. 3세기 이후 기나이세력에 흡수·통합되는 과정 등을 살펴 보았다. 여기에서 다시 하나 중요한 문제가 생겨난다. 스사노오의 출자가 신라 소시모리 지방이라고 하였는데 이때는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 시대, 곧 단군조선시대이기에 소시모리 지방이 신라땅이 될 수 없는